코로나19를 계기로 '공공신학', '교회의 공공성' 같은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교육시키는 곳이지만, 이를 넘어 교회가 속한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위한 일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많은 교회들이 지역사회의 다양한 필요를 섬기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거나, 코로나19 이후 헌혈 감소로 절대 부족해진 혈액을 성도들의 피로 채우는 '피로회복' 사역 등이 대표적인 공공성 실천 또는 공공신학적 사역이라 할 수 있겠다. 최근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원들에게 교회들이 숙식을 제공한 일도 마찬가지. 하지만 '공공신학'이란 용어가 생각만큼 정의내리기 쉽진 않다.
이러한 때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 대학교(Stellenbosch University)에서 공공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김민석 목사는 익산 지역에 한국공공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을 맡아 한국교회에 공공신학을 전하는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 익산 기쁨의교회(담임 박윤성 목사) 협동목사로 청년부에서 공공신학을 목회에 적용하고 있으며, 백석대 교수로 공공신학 연구를 이어가게 됐다. 다음은 김 목사가 소개하는 공공신학과 그 진정한 의미.
사회, 기독교와 대화 않으려 해
우위에 선 듯 그들에게 접근 시
우리와 더욱 대화 않으려 할 것
공공신학, 사회와 대화에 도움
-지금 공공신학이 왜 필요한가요.
"유럽이나 북미에서 기독교는 이미 주류에서 내려온 지 한참 됐고, 기독교가 오히려 쇠퇴 중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수십 년 전부터 물음을 던지고 있죠.
한국에선 작은교회들은 힘들어도, 대형교회들은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가 오면서 중대형교회에도 문제가 시작돼 위기의식이 생겼고, 교회가 공적(公的) 역할을 못한 채 사적(私的)으로 흐르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1-2년 사이 공공신학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 위기를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의 차이에요.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란 용어는 1970년대 미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로잔 대회가 열렸던 1974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는 개인 연구 위주로 이뤄졌는데, 2007년 세계 공공신학 학자들이 세계공공신학학회(Global Network for Public Theology, GNPT)라는 네트워크를 조직했습니다.
이후 3년마다 전 세계 학자들이 모여 공공신학 컨퍼런스를 열고 있습니다. 2007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시작됐고, 가장 핫한 분은 독일 하인리히 베드퍼드 슈트롬 교수입니다. 스텔렌보쉬 대학교에 있다 프린스턴 대학교로 가신 더키 스미트 교수도 있습니다."
-코로나를 통해 교회들이 공적 역할들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조금씩 형성되는 중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가 주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Christendom·크리스텐덤)'였던 적이 없었다고들 하시는데, '유사 크리스텐덤'일 때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기독교 사회는 아니지만, 기독교가 큰 역할을 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 이제 위태로워졌고, 기독교가 주류를 떠나 주변화됐죠.
기독교와 대화하지 않으려 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공격적인 전도 정책이나 우위에 서 있는 자세로 그들에게 접근하면, 그들은 더 우리와 대화하려 하지 않으리라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공공신학'입니다.
일례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저들(비기독교인들)을 갱생·계도해야 한다는 의식이 큽니다. 마치 우리가 교사이고 그들이 학생인 것처럼. 하지만 이는 교회 안에서조차 대화를 틀어막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더하겠죠.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파트너로서 대화해야 합니다.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기독교 사회가 아닙니다. 결국 비기독교인들과 함께 살기 위해 뭔가를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도 안 내주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면, 그들과 대화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섬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경 말씀처럼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에서만 잘 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벽만 쌓고 있어요.
그러면 성도들에게는 문제가 됩니다. 주일 하루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뿐, 주중에는 교회와 상관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주중에 세상 사람들과 대화하고 어울리고 공론장에 참여하는 것을 세상과의 타협으로 여기면, 세상과 어울리는 대신 내 할 일만 하고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만 열심히 드리는 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그들과 자주 어울리고 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은 세상과 대화 자체를 변질로 여기시죠. WCC·WEA 논쟁은 참여 자체를 막고 있는데, 자신 없는 태도 아닐까요. 보수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신학에 자신이 있다면, 오히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을 우리 색깔로 만들 수 있어야죠. 그런데 설득당할까 염려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예 참여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 언어, 세상 언어로 번역을
번역 작업, 세상 학문 이용해야
일반은총 영역 마음껏 활용을
칼빈주의자들 계속 해왔던 일
-조금 더 와닿게 설명해 주신다면.
"교회가 지역사회의 공동선 또는 공공선, 더 풍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참여하는 신학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 공론장 안에 참여해야 합니다. 각종 사회 이슈들을 다루는 공론장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해, 우리 입장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세상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변질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그곳에 참여해 대화해야 합니다.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공론장에서 권력과 돈을 중요시하다 보니, 누구도 자기 유익이 아닌 윤리적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윤리적 부분을 교회가 주장하고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요.
여기서 문제는 종교적 논리를 사용해서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도시에서 공청회를 하는데, 각자 찬성·반대 의견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그 이유로 '성경이 죄라고 하니까요'라고 말하는 순간, 대화는 끝납니다. 기독교인들은 '대화 종결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아무런 권위가 없는데, 그런 말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알아듣지조차 못합니다. 결국 공론장 내에서 기독교 신념을 반영하도록 설득하려면 우리 언어를 세상 언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설득당할 수 있는 논리를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
▲최근 백석대 연구교수가 된 김민석 목사. ⓒ이대웅 기자 |
신앙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결론이 날 수 있도록 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간학문적(間學問的·양쪽 학문 분야를 연결하거나 아우르는 학문) 연구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장을 법학자와 과학자, 심리학자와 의학자, 정치학자와 사회학자의 목소리로 인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공신학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 언어를 세상 언어로 번역하는 신학입니다. 그 번역을 위해 세상 학문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일반은총 영역이에요. 일반은총을 마음껏 활용해야 합니다. 이는 칼빈주의자들이 해왔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나요.
"공공신학이 새롭다면,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변혁주의'입니다. 보수 기독교 세계관은 '문화 변혁주의'입니다. 세속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거죠. 그러다 보면 세상을 적대적으로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대화 파트너로 보지 않고, 개종 또는 갱신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할 수는 없겠죠.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대화라고 하겠지만, 그들이 느끼기엔 대화가 아닙니다. 일종의 폭력일 수도 있죠. 대화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기독교 전통은 교회와 세상을 적대적으로 봅니다. '하나님 나라 vs 세상 나라' 대결 구도죠. 세상과는 함께해선 안 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바로 아미시(Amish)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대화 파트너로 생각하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크리스텐덤'이 아닙니다. 더 이상 주류가 아닌 주변이 되다 보니, 대화를 위해 자연스럽게 가진 권력이나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서야 '대화다운 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 비민주적 절차들도 개선돼
기존 교회 프로그램, 당회 결정
성도들은 수동적 따라가는 구조
-교회에 권력이라는 게 정말 있나요.
"예를 들어 각 도시마다 기독교연합회가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죠. 선출직들은 그런 곳을 찾아갑니다. 그런 데서 오는 권력이 있어요. 건국 이후 많은 정치인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이를 통해 해방 후나 6.25 전쟁 후 물자 배분 등에서 많은 혜택을 입고 권력화됐어요. 이를 통해 1970-1980년대 기독교가 부흥했고, 메가처치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당시를 경험하셨던 목사님·성도님들은 여전히 기독교가 이 사회에서 힘 있는 주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기독교가 주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 것을 숨기려 하죠.
그러므로 교계를 움직이는 어르신들의 인식이 변해야 합니다. 교회 위기설은 십수 년 전부터 나왔지만 하나의 운동이 되지 못한 이유는, 중대형교회에는 위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중대형교회까지 위기를 겪으면서, 이제서야 주목을 받게 됐죠. 공공신학이 이를 통해 갑자기 나온 건 아니고, 전부터 있었지만 전면으로 부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작은교회들을 중심으로는 세상과의 대화가 이어져 왔고, '선교적 교회' 등 여러 시도도 진행돼 왔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공론장 자체와 민주주의를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작동하느냐 하는 수준을 말합니다. 요즘 정치인들도 여야 간에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 극단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민주주의에 희망을 갖고,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공공신학을 통해 사회와의 관계뿐 아니라 교회 내 구조도 민주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도 비민주적 절차들이 많아요. 어르신들이 다 결정하고 청년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게 대표적이죠. 하지만 공공신학을 추구하다 보면, 교회 내 의사결정 구조가 바뀌게 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