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했습니다. 실존이란? 현재에 있는 것이나 현실을 말합니다, 그래서 나 정도로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본질은 현실과 달라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실존은 나요, 본질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앉는 것은 본질이지만 의자는 존재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본질이지만 볼펜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앞설 수 있다 하면서, 신 없는 세계를 상상하며 신의 개념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게서 모든 것이 나간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이란 개념도 헛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현실을 사람 앞에 흑암에 않았다는 말로 어둠이라 합니다. 어둠의 현실은 무질서와 길 잃음 부자유와 벼랑에서 떨어질 위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출이 되는 길은 빛입니다. 성경은 빛을 말씀이라 합니다, 빛 된 말씀을 거부하면 영원히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형상은 말이요,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고, 우리는 말로 기도를 함으로 교제하게 합니다.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말을 만드는 것입니다. 말없이 생각이 없듯이 생각 없이는 말도 없습니다. 말이 곧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언약이란 언어가 심겨졌습니다. 그들은 말로 생각을 하기 도 하고 모든 것을 약속과 성취로 생각합니다. 말이 생각으로 이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본성은 선함과 인자함입니다. 선함은 끝이 좋은 것입니다. 주님은 실패하지 않는 사랑과 신실한 사랑이라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이 단어로 생각하고, 해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과응보라는 언어를 심습니다. 매사에 원인과 결과를 따집니다. 할 말이 없으면, 전생까지 끌어들입니다. 단어가 생각을 이끌 듯이 팔자소관이란 말을 합니다. 매사를 운명으로 생각합니다. 언어에서 생각이 나오듯이 단어가 허망해지면, 생각도 허망해지고. 끝도 허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낸 말씀이 생각을 고치심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주시는 이유도 말씀이 들어갈 틈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광야는 말씀이 들리는 곳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언어를 붙들고 기도 할 때, 얽어맨 줄을 끊게 되고. 놋문을 깨뜨려버리고. 쇠 빗장을 꺾게 됩니다. 나를 죽이고 죽어라 말씀을 들으며. 주어진 말씀을 붙들고 죽어라 기도하면. 말씀에서 생각이 나오게 됩니다. 그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하늘과 땅의 연결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가 실존이 본질과 연결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