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기독교 작가이자 문화 변증가인 말론 드 블라시오(Marlon De Blasio)가 ‘친애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신론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를 크리스천포스트에 게재했다.

블라시오는 “현대 무신론은 단순히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며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대화는 일반적으로 둘 다에게 좌절감을 준다. 왜냐하면 전자의 이데올로기는 후자의 주장을 고려하는 데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더 많은 정보를 얻으면서 ‘과학 대 신앙’의 문화적 서사가 그들을 외면하거나, 자신감을 떨어뜨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음은 칼럼의 요약.

1. 물질주의 중시

물질적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세계는 우리가 가진 전부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신론은 엄격하게 이러한 매개변수 안에서 생각된다. 그 세계관에서 과학은 실제적인 기준점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설계자에게 설득력 있는 추론을 제시하는, 우주의 미세 조정과 미세 생물학의 특정 복잡성에 대한 현대 과학적인 관찰은 기본적으로 무시된다. 물론 이러한 망원경과 현미경에 의한 관찰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하진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성경의 계시와 관련된 개인적 신앙 경험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누적된 사례의 일부다.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에 기여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일부 무신론자들은 복잡성을 만들어내는 물질, 우연의 이론이 실패하고 있다고 제출함으로써, 지적 겸손을 보이기 시작했다[토마스 네이글의 ‘마인드 앤 코스모스’(Mind and Cosmos)를 참조]. 그럼에도 무신론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고집하며, 자연적 설명이 언젠가는 미세조정과 생물학적 복잡성을 설명할 것이라고 믿으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은 인간에 내재된 정보가 우연이 아닌, 마음의 의도적인 행위임을 점점 더 암시하면서 그러한 기대를 더 멀리 밀어내고 있다. 또한 과학의 법칙은 우주가 시작될 때 생겨났기에 우주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법칙들은 우주가 탄생하기 전에 없었으므로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무신론은 타협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질주하고 있다.

2. 반대 관점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지금껏 수십 년 동안, 나는 무신론자들과 커피를 마시며, 행사 및 온라인에서, 학생 및 교수들과 교실에서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일관되게 널리 퍼진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항상 내게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인 문헌을 재빨리 언급했고,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을 열기보다 잔소리꾼이 되기를 즐겨 했다. 그들에게 해당 작가의 글을 읽었다고 밝히면, 그들은 대개 놀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기독교인이 맹목적인 믿음의 추종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현대 유신론적 문학을 그에 대한 답례로써 추천하지만, 그들은 대게 거절하거나, 읽었다고 말하면서도 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진실을 발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무신론자들은 자신을 자유사상가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박사 과정에서 나는 자유사상가이면서 무신론자인 교수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 몇 년 후, 나는 학술 행사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철학적 신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철학계에 등장한, 주목할 만한 유신론에 관한 최신 문헌을 읽어보라고 제안했다.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전 그런 건 읽지 않아요.”

3. 기독교 신앙은 오해받고 있다

무신론자가 개방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바울의 로마서 서신에 대한 교양 있는 이해를 입증해야 한다. 그것은 무신론자가 로마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서구 문명에 영향을 미친 역사의 상징적인 문학 작품으로서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무신론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로마서의 저자가 의도한 것에 대한 교양을 갖춰야 한다. 나는 무신론자들이 이미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인 저자가 쓴 2차 문헌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게 무신론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세뇌적이고 지루한 설교를 듣고, 고대 의식을 지키며, 무미건조한 기도문을 암송하고, 삶의 모든 재미를 포기해야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생각과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이 궁극적 실재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과, 풍부한 지적 및 실존적 성취를 제공하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관계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4.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참되신 것처럼 살아간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친절을 베풀며, 옳고 그른 도덕적 행동을 믿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 또한 잘못된 일을 당하면 정의를 기대한다. 이제 그들은 현대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책임이 있는 진화 과정에 호소한다. 즉, 무신경하고 맹목적인 과정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정신을 모았으며, 합리성을 인식하게 되자 필요한 사회적 규범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이며, 나는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신다윈주의 개념이 거의 확실히 거짓”이라는 데 동의한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에서 발견되는 생명에 필요한 영양소는 어떨까? 자, 그것들은 자연적으로 지상에서 생겨났다. 문제는 무엇일까? 하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미세 조정, 복잡성,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물질/기회 이론의 단점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몇 가지 거친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에 진지하게 과학자들은 외계 문명이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표했다. 물론,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을 말이다!

5. 무신론은 이성을 왜곡한다

무신론은 증거와 합리성에 근거한다며 주장한다. 문제는 증거에 대한 해석이 이성을 왜곡한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물질로 시작하여 지식이 없고, 맹목적이며, 자연적 과정에 의해 진화했다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 대화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물질과 물질은 의식을 생성할 수 없다. 그것은 비합리적이다. 물질과 물질은 인간처럼 다른 문제와 이성을 중요시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정신과 귀와 눈과 후두 때문에 합리화하고, 관찰하고, 이해하고, 해결하고, 창조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무신론자는 아마도 우리가 특정한 것들을 모른다거나, 미래에는 과학이 답을 제공할 것이라 주장할 것이다. 이것은 합리성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심지어 증거에 대한 해석을 중단시킨다. 지식은 과학이 아는 것에 기초한다. 우리는 물질이 무생물이며, 인간은 완벽하게 미세 조정된 행성에서 복잡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관찰한다. 인간의 이성과 의식은 하나님에 대한 추론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고 믿는 것이 타당하다. 무신론은 하루 종일 이것을 부인하겠지만, 그러한 부정이 추론을 비합리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 따라서 주류 과학은 엄격하게 자연적인 설명이 이성을 왜곡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외계의 영향력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자유사상가는 무신론적 이데올로기에 엄격하게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기독교 신앙이 킬조이(Killjoy, 타인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자), 사이언스 스토퍼(science stopper, 과학적 진전을 막는 자), 마인드 클로저(Mind-closer,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을 막는 자), 비이성적 세계관(irrational worldview)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무신론자는 독자적인 생각으로 로마서를 읽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사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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