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부모와 자녀 사이에 공부가 들어서면 관계는 멀어진다. 자식의 성적 앞에 해탈의 내공을 가진 부모는 많지 않으며, 자신의 성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런 부모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식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전 SBS 스페셜, <부모 vs 학부모 2부>를 본 적이 있었다. 학생 하나가 엄마에게 한 말이 아직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엄마는 사채업자보다 더한 것 같아. 사채업자는 하루에 한 번 독촉을 하지만 엄마는 더 자주해. 빌려준 원금과 이자 받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아.’ 설마 부모가 사채업자이겠는가? 그런데 자식이 그렇게 느낀다면 부모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무엇이 부모를 자식에게 사채업자로 만들었는가? 경쟁의식 때문 아닌가.

여행가 한비야가 그랬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만을 비교하자. 나아감이란 내가 남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데 있는 거니까.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고 실수하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야.” 옆에 있는 이와 경쟁하지 말고 자신과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친구와 비인간적 경쟁을 하게 한다. 제도가 경쟁을 부추긴다. 교육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는 하는데, 혹 우리 아이가 뒤처지지 않을까 염려하며 엄청난 돈을 들여 사교육 시키고 선행학습 시키고, 안타깝다. 어떻게 하면 교육제도가 바뀔 수 있을까? 한국 교육제도를 바꾸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은 대통령감을 넘어서 노벨평화상도 받을 수 있다고까지 하지 않은가.

언젠가 게임을 열심히 하며 놀고 있는 아들이 눈에 보였다. 숙제를 다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일찍이다 싶어, 오늘 숙제한 것 가지고 와 보라 하니, 순간 생각이 났는지, 한 장을 덜 했단다. 부모 입장이 아닌 아이 입장에서 아이를 대해야 한다는 TV 장면이 떠오르지만, 내 얼굴은 벌써 굳어있고 입에서는 잔소리가 나왔다. 보고 들은 것이 몸으로 소화되며 체화되기에는 아직 멀었었나 보다. 딸이 5학년이었을 때, 학교에서 성교육에 관한 비디오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몸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나름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나도 자라면서 사람의 몸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을 알게 되었을 때 뭐랄까, 약간의 배신감과 진실을 알게 된 것에 대한 당혹감도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 나이 때마다 배워야 할 모든 것들을 빠짐 없이 또한 두려움 없이 배웠으면 한다. 그래야 그런 현실에 부딪혔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웠으면 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늘 먼저 배웠으면 한다. 남 이기고 성공하는 법은 될 수 있으면 배우지 않았으면 하고,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웠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한 줄 아는 법을 반드시 몸으로 배웠으면 한다. 가정 예배 때 늘 하는 이야기다.

사회가 어른들의 큰 욕심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아이들로 부터 바라고 있으니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더 괴물이 되는 것 아닌가? 괴물로 키우기보다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것이 한 아빠의 솔직한 마음이다. 헨리 나우웬이 수도원에 있는 동안 비교 의식으로 괴로워할 때 수도원 원장이었던 존 유드는 이런 권면을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시작하려는 마음이 들 때가 ‘묵상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심령 깊은 곳에 들어가면 거기 이전부터 계셨고, 비교라는 게 있기 전부터 계셨고, 자신의 자아를 허락하신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지은 건 다른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며, 남들에 비해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고 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비교 의식은 사탄이 불어 넣은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신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기에 아이들을 이런 비교 의식으로 키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쉽지는 않다.

이제는 다 커버렸지만, 여전히 아이들에게 바라는 소망이 있다. 1. 우리 아이들이 예수 잘 믿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은 이들을 저주하거나 정죄하는 죄 또한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2.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신앙의 색깔과 맞지 않다고 자신이 하나님인 양 신앙의 색깔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3. 아이들이 정의롭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불의를 행한 이들이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대가를 받고 사죄했다면 그들을 비난의 시선으로 보지 않고 따뜻한 사랑의 눈빛으로 봐주기를 또한 바란다. 4.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뜻을 가진 이들을 예수 이름으로 정죄하지 않고 바로 예수 이름 때문에 그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5. 아이들이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리지 않기를 원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늘 생각하면서 도와주며 살기를 원한다. 6. 아이들이 자신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삶의 권리를 최대한 누리면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더불어 타자의 권리 또한 존중해 주며 살기를 바란다. 7. 아이들이 세상의 아픔에 대해 ‘유체 이탈적’ 심성과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8. 아이들이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삶을 살기 원한다. 하지만 교만하지 않으며, 마치 타자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을 부속품처럼 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9.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하기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세상에 유익한 직업이기를 바란다. 10. 아이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첫 사람이거나 혹은 마지막 사람처럼 살지 않기를 바란다. 잠시 왔다 가는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기를 원한다. 11.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우주의 창조자시며 구원자시고 완성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한없이 체험하고 또한 그 사랑을 세상과 나누면서 살기를 바란다.

너무 큰 소원인가? 자신만 아는 이 보다는 하나님의 넓은 품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