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rinity In Society)연구소장 김종덕 목사
(Photo : 기독일보) TIS(Trinity In Society)연구소장 김종덕 목사

중국내 조선족

조선족은 '한국계 중국인'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한민족을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원래 중국 국적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중국내전의 결과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스스로 '조선인'이라고 불려지길 원했던 중국 땅의 한민족을 소수민족의 하나로써 '조선족'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 영토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은 국제정세와 중국내 변화에 따라 '한국' 국적이 아닌 '중국' 국적을 얻는다. 그 결과, 현대 조선족들은 대부분 자신을 중국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면, 이들은 한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지닌 염연한 '한민족 디아스포라'다.

조선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려졌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만주'라는 이름은 일제가 조선족이 거하던 지역을 동만주, 북남부, 남만주로 나누어 통치할 때 사용했던 지역명칭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늘날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부근 만주리(滿洲里)를 제외하고 모두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중국정부는 동북지역을 '동북3성'으로 구획했는데 만주지역을 동북3성으로 설명한다면, 동만주는 연변지역, 북만주는 흑룡강성지역, 남만주는 요녕성의 요하 동부와 길림성의 중남부 지역이라 말할 수 있다. '간도(間島)'는 조선인이 가장 많이 이주했던 지역으로 오늘날 연변의 '연길', '화룡', '왕청현'이다. 일제는 이 지역을 '동간도' 혹은 '북간도'라 불렀다. 1945년 중국공산당은 '간도'라는 이름을 일제의 유산이라하여 정식으로 '연변'이라 명명한다.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초기 이민자

중국 동부지역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滿洲族)의 발상지였다. 1644년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으로 천도하여 나라를 새롭게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발상지였던 '만주지역'을 신성시해 타민족 거주를 금한다. 1658년에는 백두산 이북 400km, 즉 압록강 하류 단동, 봉성, 관전 지역을 봉금지대로 결정해 조선인의 진입을 막았고, 1667년에는 중국내 '봉금(封禁)정책'을 시행해 한족(漢族)의 접근을 막았다. 그래서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요녕성 압록강변의 일부지역은 무인(無人)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가 1858년 '아이훈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을, 또한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 지역을 얻으면서, 청조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내지의 백성을 변방으로 이주시켜 토지를 개간하고 변방을 방어하기 위한 이민실편(移民實邊) 정책을 추진한다. 이렇게 봉금지역의 경계가 점차 완화된 가운데 토지가 척박했던 함경북도, 평안북도 농민들은 봉금령이 완화된 틈을 타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아침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농사를 짓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점차 봄철에 농기구와 소를 끌고 강을 건너 농사를 짓다가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계절출가이민(季節出家移民)이 증가했다. 후에는 아예 가족과 함께 강을 건너 집을 짓고 살면서 토지를 경작하였다. 비옥한 농토의 수확량은 함경도 지방보다 3배나 많았다. 그곳은 밭농사, 벼농사를 위해 개간할 수 있는 땅이 많았던 무한한 황무지였다. 울창한 숲에서는 산삼도 캘 수 있었고 수렵과 벌목도 가능했다. 가난한 조선인이 이주하기에 적합한 땅이었다. 1860년대에  간도지역의 한인 인구는 이미 7만 7천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0년대 이후, 조선내 있었던 몇가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변화는 조선농민을 만주지역으로 이주하도록 부추겼다. 17세기, 18세기 자주 불어닥친 자연재해는 촌락사회를 붕괴시켰고, 특히 1869년과 1870년 한반도 북부지역에 불어닥친 흉년과 전염병은 조선농민으로 재난을 피해 고향을 떠나게 했다. 잡다한 토지세, 군역(軍役)에 대한 부당한 징수, 정부의 곡식 대여와 환수에 따른 부패 역시 조선농민으로 고향을 떠나게 했다. 국제정세의 변화 또한 이런 상황에 협조했다. 청나라는 240여년 유지해왔던 '봉금정책'을 두차례에 거쳐 폐지한다.

1875년에 길림성 동남부 지역 봉금을 해제하고, 1882년에는 두만강 이북 지역의 봉금을 해제한다. 이는 조선인에 대한 봉금해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인이 만주지역 일대에 거주하며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에 대해 청조가 묵인해 줄수 있는 명분이 선 것이다. 조선왕조 역시 1885년 조선인의 만주이민 금지령을 철폐한다.

이런 일련의 변화들은 초기 조선인 이민자들이 통화(通化), 집안(輯安), 장백(長白), 신빈(新賓), 용정(龍井) 등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 정착하고 점차 연변과 기타지역으로 확산하여 중국 동북부 지역에 한인 사회를 형성하게 했다. 1869년 이미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 중국 경내에 거주한 조선인은10만여명에 달하였고 이들이 개간한 땅은 3만 5천ha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