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시련을 당하게 되면 오는 반응이 대부분 똑같습니다. 피하기를 원하고. 빨리 끝나기를 원하고.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에게 주어지는 시련이란 결핍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핍은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뜻입니다. 허용하신 뜻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숙으로 이끄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중한 시련 중에라도 구할 것은 피함이나 끝남이나 벗어남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지혜란 아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그 일의 의미를 알 때와 알지 못 할 때에는 행동에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형편을 아는데 남의 것을 빼앗는다는 것을 쉽지 않습니다.
남의 형편을 알고, 의미를 알고 뜻을 알게 되면 행동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지 야고보 사도는 여러 가지 시험 당하면 기쁘게 여기라 합니다. 그럼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련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뜻과 의도를 모르면 원망하게 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련이 주는 깨우침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낭비하지 않을 지혜로 변화시켜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축복 주면 낭비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기회와 사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한 교훈과 성장과 깨우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낭비든지 낭비는 나쁜 것입니다. 축복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시련 중에라도 믿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처럼. 믿음이 확증되는 것은 삶을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시련은 믿음을 사용할 기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시련 중에 믿음이 나와야 하는데, 의심이 나온다면 그 시련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시련 중에 의심하는 것은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서, 왜 이런 고난을 주냐? 고 말합니다.
문제는 상황보다 힘들게 하는 것이 이런 질문들입니다. 신뢰 없는 의심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러나 두 마음 품으면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 합니다. 두 마음은 두 영혼이란 뜻입니다. 예배 따로, 의심 따로. 입술 따로, 행동 따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지 않은 것이기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련이 오면 본능적으로 피함이나 끝남이나 벗어남을 구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라도 시련 중에는 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힘을 기울여서 라도 시련 중에 믿음을 붙 들어야 합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지혜와 믿음 붙든 사람은 세상의 판도를 뒤집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