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제사에는 크게 번제와 화목제입니다. 번제는 제물의 100%을 모두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린 후에 사람 몫이 없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제사의 제물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습니다. 내일 까지 남겨 두면 안 되고, 그 날에 다 먹어야 합니다. 문제는 황소 800파운드짜리인데 식구가 4식구라면 그 날 다 먹으려면 1인당 200파운드씩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걸 먹을 수 없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일단 아는 사람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화목제 정신은 나누는 훈련입니다. 인색함을 깨는 훈련입니다. 흘려보내게 될 때, 영적 생태계가 얼마나 풍성하게 변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훈련입니다.
교회도 이런 한계 설정이 필요합니다. 어느 시점까지 헌금을 남기지 말고, 사용하는 것이고. 어느 시점까지 성도가 모이게 되면 교회를 분립해야 합니다. 그러면 안 보이는 것이 보이게 되고, 접하지 못한 사람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계를 설정하고 나누면, 사건이 벌어집니다. 만남이 이루어지고. 역사가 벌어집니다. 말뚝에 묶인 코끼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끼리는 성장하면 힘이 생기게 됩니다, 묶인 것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묶인 상태로 성장을 하면 어른으로 성장해서도, 습관 때문에 죽을 때까지 묶여 산다는 겁니다. 화목제는 한계에 묶인 크리스천에게 한계를 넘게 만드는 통쾌함이 있습니다.
통케 함 때문에 내가 이럴 수 있구나! 내게도 이런 능력이 있구나! 이렇게 흘려보내니까,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구나! 생각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목제 정신이 한계를 깨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할 수 있는 것은 순종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없는 것은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화목제 정신은 순종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할 수 없다는 것까지 신뢰하고 맡기기만 한 것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니 역사가 벌어지고 신뢰하니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에 물 채우는 것. 맹물을 사람들에게 갖다 주는 것을 평소에는 못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하고 갖다 주니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화목제 정신은 순종의 영역을 넓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쌓아두려는데 본성이 있습니다. 미래가 불안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쌓아둠을 질책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그러나 흐르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흐름에 풍성함을 낳습니다. 그리고 흐름은 생태계를 살립니다. 흘러 보냄에서 가능케 된다는 겁니다. 화목제의 정신은 단단한 자기중심성을 깨는 힘이 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