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희망하는 존재다. 희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희망은 희망하는 행위와 희망하는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희망하기 때문에, 희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내일 해가 뜨기를 희망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희망때문에 절망도 있다. 희망이 희망 고문이 되는 현실때문이다. 절망적인 상황때문에 오히려 희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에서는 희망이 나올 수 없지만, 절망은 희망에서 나오기 때문에, 희망이 존재론적으로 더 우선한다. 절망없는 희망은 있어도 희망없는 절망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한다면 절망도 인정해야 한다. 절망 때문에 희망하는 것을 부질 없는 욕망으로 치부할 수 없다. 인간이 희망을 멈추는 순간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뿐이다.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을 맛 보았다. 마치 타노스(죽음)가 그의 엄지손가락을 튀기자 인류의 절반이 다 사라지는 엔드게임을 보는 것 같았다. 수 백만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렸다. WHO(세계 보건기구)는 지난 2년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1491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오백명 중에 1명 꼴로 사망한 것이다. 모든 상황이 마치 사탄이 권좌에 있는 것처럼 절망스러웠다(계2:13). 그러나, 그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결코 희망을 멈추지 못했다. 교회들은 성도들이 대면하여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기를 희망하며 기도하였다.
왜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하며, 희망하면서도 절망하는가? 희망의 근거가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산 소망"이라는 말은 희망하는 행위와 희망하는 내용 모두가 살아있다는 말이다.
1) 산소망: 소망하는 행위의 유효성
희망때문에 절망하는 이유는 모든 희망이 다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취될 수 없는 희망이라도 희망하는 행위만으로도 우리가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모든 희망을 다 쓸어가는 절망이 있다. 모든 희망을 절망으로 만드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희망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희망의 종말상황을 피할 수 없다. 타노스의 말대로 죽음은'inevitable' 이다. 그런데, 만일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모든 희망하는 행위는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바울의 말대로 죽음이 마지막이라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15:23)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한스 베더는 "희망은 인간의 삶에 대하여, 오직 그것이 인간의 죽음 이후에도 또한 유효할 때에만 관련될 수 있다."고 하였다(과학과 신학의 대화, 337). 베드로는 바로 그 유효한 희망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능하고, 유효한 희망! 그것은 죽음과 함께 절망의 무덤으로 내려가는 희망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도 성취가능한 희망이다.
2) 산 소망: 죽음을 극복한 생명(산)에 관한 소망
사람들은 많은 희망의 내용을 가진다. 구찌나 샤넬 백 하나 정도를 원하는 소박한(?) 희망에서부터 람보르기니나 부가티를 원하는 거창한 희망도 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라면,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샤넬백 매고 람보르기니 타고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 죽음의 순간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사랑하고 생의 이별때문에 슬피 울어주는 사람의 품이 더 필요하다.
오래 전, 유초등부 전도사로 사역할 때, 준혁이라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준혁이는 소아 뇌종양으로 이미 한 쪽 눈을 적출한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눈도 시력을 잃고, 교회에 올때는 동생의 손을 잡고 더듬거리며 예배당을 찾았다. 준혁이에게 죽음은 곧 불가피한 현실로 찾아왔다. 그런 준혁이에게도 죽음이 결코 정복하지 못할 희망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영생에 확신때문에, 어린 준혁이는 천사같은 얼굴로 찬양하고 예배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 이름을 잊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도 준혁이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 확증된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 이 희망은 구찌백을 들고, 부가티를 타는 희망과는 전혀 다른 희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하늘에 간직하셨다. 그래서, 이 희망은 죽음 이후에도 유효한 희망이고 그래서 희망하는 누구라도 반드시 희망해야 하는 희망이다. 죽음이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이 희망이야 말로 세상의 모든 절망을 위로할 수 있는 희망이다. 이 희망의 확실성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는 말씀이 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13)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15)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것이요"(16).
바울은 미래(모든 죽은 자의 부활)가 현재(그리스도의 부활)를 결정하였다고 말씀한다. 현재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희망의 근거는 오직 미래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산 소망 때문에 우리는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으며, 그 희망은 반드시 유효한 희망이 되는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이 산 소망으로 인하여 모든 성도들이 다시 힘차게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방삼석 교수(Ph.D)
센트럴신학대학원 신학분과장, 조직신학 조교수(겸임)
달라스 뉴라이프 선교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