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이 미국에게 원자폭탄을 맞음으로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 지자 선전 포고를 하였고 미국에 이어 소련에도 항복을 하게 되었다. 소련은 이북 지역의 일본군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이북 전역을 점령하였다. 그후 9월에는 38선 분계선을 중심으로 일체의 교통과 통신과 왕래를 완전히 차단함으로 사실상 남과 북이 분단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련의 군정 총 책임자인 평양 주둔 정치 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수권자로 세우기 위해 국민 선거를 통해 인민 대표를 뽑아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정부 내각을 구성해야 했는데, 김일성은 이북에서는 지지 기반이 전혀 없고 김성주라는 본명을 갖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기에 소련 군정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김일성으로 둔갑시킨 것이었고 그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원래 김일성은 독립 운동 중에 사망하였고 그 사실을 몰랐던 대중들은 김일성이 환국하여 환영대회를 한다고 하자 평양 광장에 나갔지만,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김일성이라고 소개하는 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다.
평양에 돌아온 김일성은 정권 수립을 위해 지지 기반이 필요하였기에 그 지지층을 만들어내야 했다. 소련 군정은 교회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그 당시 이북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만식 장로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앞장 세웠고 이북 교회의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제도화하기 위해 1946년에 11월 28일에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을 창단하였다. 김일성의 외가 친척인 강양욱 목사를 그 어용 기독교 단체의 대표로 세웠으며 전국의 영향력 있는 목사와 천주교의 신부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기독교연맹에 가입과 김일성 정권을 지지해 줄 것을 회유하며 때로는 협박하면서 많은지지 층들을 확보하였다. 여기에 적극 가입하고 지지한 목사들 중에는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강양욱 목사는 1948년 9월 1일까지 8만 5천명을 '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이 당시 이북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약 20만 명이었으므로 대단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공산당 정부 수립에 직간접적으로 지지를 한 것이었다.
1949년 봄, 강양욱 목사는 김익두 목사와 김응순 목사를 기독교도 연맹 확장에 십분 활용하였다. 그 당시 일제 말기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총장이었던 김응순 목사는 교회를 살리는 길은 조선기독교도 연맹에 가입하는 길 밖에 없다고 하면서 친근한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유인했고 협박까지 해가면서 이를 실행하였다. 실제로 가입하지 않은 이유택, 문경균 목사와 평북 정주의 최택규 목사, 선천의 여러 목사들을 투옥시켰다. 평양신학교 교장인 김인준 목사는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김익두 목사는 그 당시에 가장 유명한 부흥사로 전국을 다니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많은 기독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인도한 목사였는데, 그도 처음에 현혹되어 그 연맹에 가입하였으나 후에 김일성을 직접 만나 본 후에는 그의 정체를 알고 "공산주의는 비단 보에 쌓여 있는 똥이다"라며 그 허구와 모순성을 비판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6.25전쟁 시에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때에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그를 총살함으로 순교를 당하였다.
북한 지역의 공산화 과정에 1948년 9월9일에 김일성 정권 수립에 협조를 하고 참여한 교회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10여 년 전인 1938년의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배도 행위와 같이 '제 2의 신사참배'를 다시 범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결국 2년 후에는 남과 북을 피로 물들인 동족상잔의 6.25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 숭배를 범함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고 두 왕국이 앗수르와 바벨론제국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가 되는 역사와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