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은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를 온 세계에 선포함으로 그 당시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하에 있었던 수십여 개의 나라들에게 독립 사상과 민족주의에 대한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 당시 20세기 초의 제 1차 대전(1914~1918년)과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 등은 일제 강점기 하의 조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소련이라는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수립은 조선의 지식인층과 청년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고 특히 기독청년들에게는 반 기독교운동과 새로운 사조와 민족주의 가치관을 형성케 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곧 교회 내에 큰 파급을 주었다. 심지어 기독청년들 가운데서도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무신론적 사상으로 전환되어 민족주의 운동과 항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수용되기도 하였다. 이들 가운데에는 극단적 무신론적 입장을 취한 계층이 있기도 하였고 민족주의에 근거하여 항일운동으로 치우친 계층들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사회주의에 빠진 청년들과 일부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도 기독교 신앙과 공산주의 이념을 함께 공유하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급변의 사조 흐름은 유럽과 미주 대륙에서도 동일하였다. 미국의 교회들은 영국으로부터 온 진화론과 독일로부터 밀려든 성경의 고등 비평과 미국 내에서 일기 시작한 진보 자유주의 신학, 사회주의, 공산주의, 볼셰비키즘 등의 영향으로 미국 내의 신학계와 교회에도 큰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시대적 격변으로 일제 강점기 중에 그 당시의 모든 교회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왜냐하면 한국의 신학과 신앙의 경륜은 초기 걸음마 단계였기에 비판 의식과 저항 능력을 겸비치 못하였다. 그러한 즈음에 미국과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와 목회자들과 진보적 신학 노선인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함경도 지역은 상대적으로 그 파장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진보적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사들 가운데에는 기독교인이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동휘91873~1935)가 있었다. 그는 1918년에 최초의 조선사회당을 창립하였으며 "조선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대안은 기독교"라고 외쳤던 인물이었다. 김규식(1881~1950)이라는 정치인은 1922년의 '제1차 극동피압박 민족대회'에 기독교도 동맹으로 참석했었다.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양육된 유학파 인재였고 새문안교회 장로였다. 여운형은 평양신학교와 중국 금릉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였고 승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1923년에 <청년>에 실린 글에서 "기독교 사상과 사회주의가 동일하다"라고 하였고, 1924년 <기독신보>에서 "진정한 사회주의는 참말 교회로 더불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적고 교회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러한 신학적인 면과 이념적 사고의 혼돈이 정립되는 데에는 수 십 년의 시행착오가 필요로 하였다.
특히 평양신학교에서 청교도적 정통 보수 신학만을 공부하였던 목회자들에게는 이러한 급진적 사조와 진보적 신학에 대해서 전혀 비판 의식과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에 교회에서의 신앙인들과 특히 청년계층과 지식층에게 신학적으로나 사변적으로 대치가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기 시작한지 불과 20여년 만에 새로운 이념과 세속적 풍조와 사조는 견고하였던 평양의 장대현 교회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교회에 큰 폐해를 주었다. 1926년에는 평양의 장자교회인 장대현교회에서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청년들이 변인서 부목사를 중심으로 길선주 목사와 장로들에게 지도력 부족을 이유로 사직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지속되었다.
이에 청년들이 반기를 들고 심지어는 강단까지 점거하는 파행이 지속되었다. 결국 변 목사를 시골로 보내고, 길선주 목사는 성역 기념식 후 신도 500여 명과 함께 "이향리교회"로 분리 되고 반대 청년들은 교회를 떠남으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그전 같은 강단의 권위와 교회를 향한 거룩한 신앙이 변질되었기에 발생된 것이었으며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여러 사유로 불상사가 발생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거치면서 이북지역의 전반적인 교회의 수 증가와 교인들의 증가 추세는 상승세를 지속하였다. 1926년 이북의 교회당 수가 1,214개소였고, 교인 수는 101,219명이었으나, 1940년에는 교회당 수가 2,125개였고 교회 수는 265,285명이었으므로 교회 내 외로 많은 문제가 상존했지만, 14년 동안 외형적으로는 거의 두 배의 성장을 지속한 것이다. 그 당시의 교회는 시대적 격변기를 통해 성장통을 감당하면서 영적인 성숙의 지향과 교회 안팎의 위기를 극복해야하는 교회사적 멍에를 감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