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 코로나 시대를 지내오면서 미주 여러 한인교회들의 예배와 사역들에 적지 않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와 복음 전파 사역을 멈추지 않음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 모든 상황 가운데 기독일보는 이 땅에 많은 복음 중심의 교회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창간 18주년을 맞이하는 기독일보는 이제까지도 그러했지만 앞으로도 수많은 교회들을 세워 나가고 목회자들, 중직들 및 모든 성숙된 크리스천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와 신앙생활에 도움되는 글과 자료들을 제공해 줄 것에 기대가 큽니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신문, 온오프라인의 뉴스들, SNS 및 유투브 영상 등을 보면 '저 분이 말씀하시는게 과연 내가 아는 복음 맞나?' 혹은 '저 분이 읽으시는 성경이 내가 읽고 있는 똑같은 성경이 맞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학자든 목사든 성도든 자신이 보고 느끼고 강조하고 싶은 문맥 또는 '컨텍스트 (context)'에 국한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면 안됩니다. 오직 성경 본문인 '텍스트 (text)'가 컨텍스트를 지배해야 합니다. 제가 늘 설교하며 우리 성도님들에게 강조하고 또 강의하며 신학생들에게 강조하는게 있습니다. 바로, 복음은 변하지 말되 복음을 전하는 통로를 문화와 시대에 맞춰 변화시킬 수 있어야 진정한 복음 전파의 지혜가 있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잘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컨텍스트를 활용만해야지 컨텍스트가 텍스트를 집어삼키게 놔주어서는 안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아테네 이 곳 저 곳에 있는 신전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그리스 신화를 통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행 17:23)"라고 써놓은 단을 보았다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바울의 설교에 있어 그리스의 신화나 신전 문화는 그저 컨텍스트로 활용된 것이지 절대 텍스트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신학적, 목회적 트렌드를 보면 일부 특정 계층이나 성향, 그리고 목적이나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을 초점으로 복음을 그들만의 것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심지어 그 관점에서 성경 66권을 해석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원하는 해석이 아니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신학교에서 배운 관점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해석하고 설교하면 그것은 미혹하는 영이고 말씀을 왜곡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컨텍스트를 읽는 기독교 신문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복음이 잘 전달될 수 있는 통로를 시대와 문화적 배경을 읽어 수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그 통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전파를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기독일보가 그런 'Way Maker'의 역할을 잘 해내주리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기독일보와 기독일보를 맡아 헌신하는 모든 리더십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이 늘 함께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