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묘원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약 45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곳이 본향인양 묻혀있다. 그 중에 3대에 걸쳐 여섯 명이 묻혀있는 가족이 있다. 그가 바로 미 감리교 해외 선교부에서 파송된 의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 선교사이다.
그는 1860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무디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가난하고 불행한 아시아인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소명을 받고, 뉴욕 퀸즈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빈민들을 위한 의료선교의 꿈을 가지고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한 로제타 셔워드(Rosetta Sherwood, 1865~1951)라는 믿음의 여인이 있었다. 이 둘은 뉴욕의 한 병원에서 만나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약혼을 하였다.
그들이 미 감리교 선교부에서 훈련을 받고 조선에 1891년에 입경하였다. 제임스 홀이 평양 선교를 시작한 것이 1892년이었다. 그는 그해 3월부터 평양의 여관에 머물면서 환자들을 치료함으로써 평양 주민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1893년 평양성 내의 서문통에 두 개의 가옥을 구입하였다. 그곳은 기생학교로 쓰였던 건물과 관사로 쓰였던 집이었으며 주거와 선교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해 3월에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는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평양 대동문 널다리골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때보다 3개월 앞선 것이다. 그들의 사역의 중심은 의료 활동이었으며 그 사역은 순탄치 않았다. 그 당시 기독교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진 평양 감사인 민병석은 퇴거 명령을 내리거나 환자들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수시로 훼방을 놓았으며 일부 평양 주민들은 그의 집에 돌팔매질을 하여 불안에 떨게 하였다. 그 이유는 저들에게는 30여 년 전 셔만호 사건에 대한 외국인의 적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홀 선교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의 신앙으로 진료소 설립을 강행했고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으로 주민들을 대하자 그의 모습에 저들의 마음의 문도 점차 열리게 되었다. 그의 헌신적이며 겸손한 의료 봉사는 강퍅한 평양 주민들의 마음을 변화시켰으며 평양 감사의 부인의 병을 고쳐주자 호의적으로 변하여 오히려 저들의 활동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기숙사 학교를 설립하여 평양 소년 13명을 모집하여 한글, 한문, 성경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그 학교의 이름이 '격물학당'(格物學堂)으로서 그 뜻은 만물의 이치를 배우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이 학교 설립과 운영에는 김창식을 비롯한 여러 조선인 동역자들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세워진 이 학교가 크게 발전하여 1918년에는 '광성학교'로 개명되었으며 해방 후 공산화되자 공산 정부는 기독교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평양제1중학교'로 다시 개명한 역사를 갖고 있다.
홀의 사역이 안정되자 그의 아내 로제타 홀도 아기를 데리고 평양으로 1894년 5월 7일에 이주하여 남편과 함께 사역을 본격화 하였다. 이 모자가 평양에 당도하자 최초의 서양 아기를 구경하기 위해 약 1천 5백여 명이 몰려들어 마치 외계에서 온 사람들인 양 신기하게 여겼던 것이다.
1894년 9월 15일 평양에서 청군과 일본군과의 전투가 벌어져 평양 성내는 전쟁터로 변했고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이에 홀 선교사 가족도 위험을 피해 한성으로 내려왔다가 전투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자, 그는 부인과 아기를 한성에 둔 채 홀로 다시 평양으로 올라가 그곳에 부상당한 군인들과 주민들의 치료에 온 정성을 쏟았다. 홀은 밀려드는 환자를 돌보아 주면서 극도의 피로감이 쌓이자 그 당시 평양 성내의 전염병인 말라리아에 감염되었고 건강 상태가 더욱 악화되자 한성으로 운송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다시 발지티푸스에 재차 감염되어 1894년 11월 24일 조선에 온지 3년 만에 아내와 아들과 유복자를 남겨두고 순직하여 지금의 양화진 묘원에 묻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평양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던 미 장로교로부터 파송된 사무엘 마펫은 그의 순직에 대해 이같이 말하였다. "조선교회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던 가장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스러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라고 예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