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두만강과 약 18킬로를 접하고 있는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은 조선 말기인 1863년에 함경도의 주민들이 극심한 기근과 정부의 수탈로 인해 고통 받았던 13가구가 국경을 넘어 광활한 대륙이며 무주공산 같은 토지를 개간하였으며 특히 벼농사를 성공시킴으로 조선인들에게는 신천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들의 성공적인 경작과 정착이 소문이 나면서 이에 함경도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빈농들이 연해주로 몰리면서 1869년에는 약 1만 여명이 이주하였고, 1914년에는 6만3천 여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들 연해주로 정착한 주민 중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기에 이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목회자가 필요하게 됨으로 그곳에 선교사 파송도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던 것이다. 먼저 장로교에서는 1909년에 최관홀을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의 중심지인 불라디보스토크에 파송하였다. 이어서 오순해, 최일영, 최홍종, 박창영, 한가자를 파송하였다. 1910년에는 최관홀 목사가 개척한 교회에는 출석교인이 648명과 세례교인 39명과 학습교인 68명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로부터 조선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에 제동을 걸면서 어려움이 따랐고 심지어는 그들의 종교로 개종할 것을 압박하였다. 이 러시아 지역은 1천여 년 가까지 러시아정교가 국교였기에 그들의 종교적 기득권은 매우 강하였다. 이를 거부하면 종교법에 따라 감옥을 가야 했고 압박이 거세지자 최관흘 목사는 그만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였고 그곳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9년 후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장로교회로 복권을 신청하였다. 조선예수교 총회에서는 이어서 1918년에 김현찬 목사를 그리고 함경남도 노회는 박정찬 전도사를 다시 파송하면서 선교에 활기를 띠었다. 이들의 사역 대상은 조선인들이었다. 러시아인들은 그곳 조선인들을 까레아스키(고려인)이라 불렀다.

이어서 감리교에서도 1912년에 손정도 목사를 파송하였으나 그도 러시아 정부로부터 러시아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강요 받자 그는 이를 거부하고 귀국하였다.

1920년 이후에는 카나다 장로교 소속의 프트(Foote)선교사가 조선인 교회의 사역을 지도하였다. 감리교에서도 다시 러시아 선교를 재개하였고 장로교와 감리교가 협력하여 선교를 함께 함으로 사역이 매우 활성화 되었다. 1922년에는 연해주 지역의 중심지인 불라디보스톡과 북쪽 내지에도 교회가 34곳과 교인 1.935명과 목사 5명과 초등학교 5개와 야학교 35개가 설립되어 교회와 교육 사역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그로 인해 시베리아 노회도 설립되었다.

한편 침례교는 장로교와 감리교보다 더욱 시베리아 지역에 선교 역량을 집중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 침례교는 장로교와 감리교에 비해 늦게 조선선교를 시작함으로 이미 전국적으로 구축된 선교지역이 확정되었기에 이에 대한 사역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만주와 러시아 선교에 집중함으로 큰 결실을 거두었다. 조선에 최초의 침례교 선교사로 들어온 펜윅(Malcom C. Fenwick, 1863~1936)은 1906년에 대한기독교회를 창립하면서 교회 본부를 강원도 원산에 두고 남만주와 연해주를 포함한 시베리아 지역을 전도사역을 확장하였다. 너무도 광활한 지역이었기에 그곳을 5개로 분할하였다. 불라디보스톡, 이누치노, 포시에트, 크라스키노, 파르티잔스크였다.

이 지역의 사역자로서 가장 크게 사역을 확장시킨 최성업 목사와 그의 아들 최응선은 시베리아의 사도 바울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버지 최성업이 7개 교회와 아들에 의해 개최된 14개의 교회가 있었다. 이들이 개척한 교회는 시베리아 지역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그 공로가 매우 컸다. 그렇게 되기까지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사의 최고의 권위자인 민경배 박사는 러시아 북방선교에 대해 이같이 평가하였다.

"한국교회 역사상 찬란한 펜윅의 공헌은 만주 간도와 러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의 투신이다. 이들의 선교행전은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거대한 사도행전이며 순애보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