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랴가 호위병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백성에게 이르러 보매 왕이 규례대로 단 위에 섰고 장관들과 나팔수가 왕의 곁에 모셔 섰으며 온 백성이 즐거워하며 나팔을 부는지라 아달랴가 옷 을 찢으며 외치되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하매"(왕하 11:13-14)
유대인들은 남자로 태어난 것과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유대 인으로 태어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유대 나라에 여왕이 있었다니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이 1945년 건립된 후 '나는 구세주의 오심을 완 전한 믿음으로 믿는다'라는 고백을 한 골다 메이어(1898-1978)는 여성 수상으로 1969-1974년 동안 믿음으로 봉사하였다.
다윗 왕조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된 후 북 이스라엘에는 여 왕이 없었지만 남 유다에는 여왕이 한 명 있었으니 그녀가 아달랴 여왕이다. 아달랴 여왕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으나 그녀를 소 재로 한 희곡은 몇 편 남아있다. 특히 17세기 프랑스의 3대 극작가 중의 한 사람인 장 라신이 쓴 3대 비극 중에 아달랴(Athalie)가 있다.
아달랴는 유다 여호람 왕의 왕비였으나 그 아들 아하시야 왕(왕하 8:25)이 죽자 왕권을 잡은 것이다(왕하 11:1).
아달랴는 6년을 통치하였으나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내던 아하 시야의 아들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등극하는 바람에 죽임을 당했다. 아달랴의 행적은 남아있지 않고 오직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라는 외침만 기록되어 있다.
한편 9세기 중엽 요한나라는 교황이 거리 미사를 하던 도중 아이를 낳아 그 자리에서 성난 군중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요한나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였으나 여자로서는 불리한 조건이 너무 많다고 생 각하고 남장행세를 하였다. 일단 유명해지자 그녀는 로마 시민의 신임을 얻어 교황의 자리까지 올라간다. 교황 재임 중 임신하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감추고 무리하게 다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후 역대 교황들은 미사 행렬 시 여자 교황이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 한 장소를 불미스럽게 여기고 철저히 피해 다녔다고 전해진다. 17세기 초까지 가톨릭에서는 요한나 교황이 2년 수개월 동안 재임했던 사실을 인정했으나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이에 관한 기록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요한나의 교황 재임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고 생각하고 있다. 여자 교황에 대한 소설이나 영화, 연구서 등의 끊임없는 출간은 많은 사람들이 여자 교황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다에 유일한 여왕이 있었던 것과 같이 교황 중에도 유일한 여자교황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