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교회 역사는 그 나라의 역사 속에 상호 작용하며 흐른다. "역사는 과거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가 되고 현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며 미래를 바라 볼 수 있는 창이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한민족의 시대적 소명은 "통일 대한민국"이며 교회도 역시 동일하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지 75년이 경과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그 날을 막연히 기다리기 보다는 그 통일의 비전과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공산체제 하에 억압과 핍박 속에 살아가고 있는 2천4백만의 북한 동포들과 그 가운데에 신음하며 자유의 날을 갈망하고 있는 그루터기 기독교인들을 기억하며 자유 통일의 날을 함께 품고 나가야 한다.
본 필자는 30여 년 전인 1991.10.1일에 중국 단동 압록강가에서 동이 틀 무렵 신의주를 바라보며 이같이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저 강 건너 동편에 해가 떠오르고 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해가 그곳에 떠 올라 저 북녘의 동포를 비추어 주시옵소서!" 나의 이런 기도가 북한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믿어 지지 않는 사실이 밝혀졌다. 강 건너 철의 장막에 쌓인 신의주 땅에 "신의주 제1교회"를 섬겼던 고령의 기독교 신자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 될 수 없었다. 더욱 기이했던 것은 일명 "지하교회 성도"라고 하는 저들 중에는 주일에 자신들이 다녔던 예배당의 뜰을 돌면서 침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뿐만 아니라 장차 통일이 되면 공산화되는 시기에 남으로 내려간 성도들은 통일이 되면 교회 재건을 위해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기로는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이북지역에는 공산화되는 과정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고, 다시 1951년 1.4 후퇴 시에도 많은 이북 동포와 기독교인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그 후 북한은 엄혹한 공산체제 하에 그 땅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숙청되고 산간 벽지로 추방되어 더 이상 그 곳에는 기독교인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장망성 같은 그곳에 지하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한국교회 역사와 특히 북한 교회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한국교회사에서는 1885년 4월5일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파송된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파송된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제물포에 들어 온 그 날이 교회사의 원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교회사의 디딤돌을 놓은 앞선 선교사가 있었다. 그가 알렌 선교사(Horace Newton Allen,1858~1932)였다. 그는 1884년9월에 미국 공사관에 공의로 입경하였는데, 그 해 12월 갑신정변시에 고종과 민비의 최 측근인 민영익이 자객에게 테러를 당하여 다 죽어 갈 때에 그를 수술해 살려냄으로 그 공로의 보은으로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세워졌다. 이 병원 운영과 조선 의료인 교육에 봉사할 일꾼이 필요하였는데, 이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병원에 직원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고, 아펜젤러는 고종의 승인을 받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제학당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명의 최초의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 덕분에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알렌을 최초의 한국교회사의 첫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처럼 선교사의 신분으로 선교에 전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렌은 1887년에는 고종의 부탁으로 워싱톤의 주미공사관의 참찬관으로 박정양 공사를 돕는 조선의 공직자로 한.미 외교사에 디딤돌을 놓는 기여를 하였다. 1890년에는 조선에 주한 미공사가 공백되자 미 정부에 의해 역으로 주한 미공사관의 대리공사를 맡았다.
그 후 1905년 7월에 미국과 일본이 "가스라 테프트조약"으로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밀약에 이어서, 그해 11월에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한성에 미공사관이 폐쇄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한국교회 역사에 공식인 선교사 신분은 아니었지만, 한국교회사의 정사를 형성하는 데에 개척자였고 선구자적 사역을 한 것이며 나아가서 한.미 외교사에도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음이 확실하다.
이처럼 알렌이 조선 선교의 선두주자로 입경한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이어서 스크렌턴(Mary F.B. Scranton, 1832~1909) 모자가 들어와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연이어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 중에 이북 지방에 선교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몇몇 선교사가 이에 나선다. 1890년에 미 북장로선교부로 부터 파송된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1892년에 카나다 출신이며 감리교 파송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5)과 그의 아내 로제타 셔워드 홀(Rosseta S. Hall,1865~1951) 의사 부부와 이어서 1897년에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선교사가 들어와 이들이 이북의 중심지인 평양을 선교지(Mission Station)로 정하여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이북 지방의 선교가 본격화 되었다. 이들의 사역으로 인해 나타난 결실은 상대적으로 이남지역보다 이북지역의 선교활동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