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기술공업 과목에 도면 그리기 수업이 있다. 복잡한 구조물의 정면 평면 측면 비교적 난이도가 높은 단면을 상상하여 그려내는 일은 이과생 아닌 내게도 매력 있는 공학이다. 기억에 남는 바다 위 현수교를 도화지에 스케치하거나 현실에 맞춘 월세방 평면을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려 청사진으로 뽑아낸 적도 있다.
제도용 2B 연필로 자 대고 선을 그어 입체를 평면에 옮기는 작업을 지금껏 했더라면 성경 속 건축물을 재발굴하며 언약궤 발견 당시 요시야처럼 기뻐하리라. 그럼에도 성격과 적성 판정표에 의거, 문과를 통해 금융기관에 입사하면서 내게 이데아를 투사해 주던 이상적 학문 건축학은 개론에서 발을 멈추고 만다.
건축가의 두뇌는 공간 창조에 탁월하다. 방향을 선택하고 각도와 기울기를 결정하며 구조 설계까지의 모든 구상을 작업 현장 아닌 두뇌 공간에서 한다. 선을 그어 면을 만들고 면을 쌓아 입체를 세운다. 볼 수 없는 뒤쪽은 투시하여 평면에 옮겨낸다.
삽으로 터 파기를 하기도 전에 상상으로 기둥을 세우고 벽면을 채워 수십 층 쌓아 올린다.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누가는 분명 공학설계 분야의 재간둥이이다. 그가 질병 치료의 물적 은사 외 말씀 설계의 영적 은사까지 부여받았음이다. 사도행전은 화강암 반석 위에 내진 공법을 가미한 절대 영원의 건축물로 3차원 입체 설계의 청사진을 통해 그 건축학 구조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때까지가 누가복음이요 승천 후 일들을 적어놓은 책이 사도행전이다. 초대교회가 지나온 길, 사도들의 행전은 베드로를 투입하여 전반 12장까지 예수처럼 행동한 그의 모습을 기록하고, 바울을 등장시켜 13장부터 예수처럼 말하고 가르치고 고난받은 그의 사도성을 분명히 밝힌 복음전파의 역사서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베드로와 이를 바울에게 동일 적용하는 장면이 눈에 띈다. 그러한 베드로조차 바울이 다메섹 어느 도상에서 생의 결정적 터닝포인트를 만나면서 역사 뒤로 사라진다. 하나님의 구원 청사진대로 진척되어 나갈 뿐 인간의 어떤 작위도 첨부되지 않는다.
행전은 누가복음의 결과요 후속 편으로 승천에 이어 사도와 제자들의 기다림부터 기록하여 놓은 책이다. 오순절 복음 증거 활동의 신호를 쏘아 올릴 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고 바울의 로마 복음 활동에 대한 기록으로써 행전의 대단원을 마친다. 행전은 복음서와 서신서를 연결하는 교량이다. 하나님 나라와 지상 교회의 초기 발자취를 보여주는 신약 역사서다. 성령의 역사, 선교 명령, 기도 능력,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삶의 방식이 담겨 있다. 행전이 없다면 초대교회의 역사, 바울서신의 배경, 연대기 이해가 어려울 테다. 바울이 편지한 교회의 기원과 바울 사이의 관계 정리도 힘들 게 분명하다.
사도들의 활동보다 복음이 증거되고 수용되어 믿는 자들이 생기고 교회가 세워지는 사건의 관점에서, 성령께서 모든 사건을 주도하시고 사도 제자 교회는 동작 실행자라는 관점에서 성령행전이라 하겠다.
세 개의 축
건축물 <행전>은 구조적으로 치밀하다. 시공간 흐름에 따라 성령의 역사에서 시작, 예루살렘 선교,
스데반과 빌립, 사울의 등장, 시리아-팔레스타인의 복음 확산, 1차 전도여행과 예루살렘 공의회,
2차 3차 전도여행 및 끄트머리에 예루살렘과 로마 여정을 실어 역사서 기록 방식을 채택한 후, 이 기본 구조를 방해하지 않도록 세 개의 축을 별도로 구축한다. 대략 전반부 끝에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을(12장) 기재하고 남은 반쪽의 시작에(13장) 바나바와 사울을 싣기로 한다. 초대교회 반석에 주도적 역할한 베드로와 이방세계 교회에 전폭적 헌신한 바울의 활동 중 누가는 필요한 자재만 선택한다. 전후반 이중 구조로 하되 그 둘의 이야기를 모두 투입하지 않는다. 행전 전체를 다시 지리적 삼중 구조로 구분하고 이를 또다른 여섯 공간으로 구획하여 6중 구조로 엮는다.
2중 구조 - X축
두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열여덟 번에 걸쳐 극명하게 대조한다. 누가는 이 얼개에 맞는 스타트로 행전 3장에 '나면서 못 걷는 자'를 치유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투입한다. 의사여서일까. 누가는 예수께서 병자 치유하신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테고 그 기억을 반추하여 병자 치유 스토리부터 펴나간다. 이 대응 장면을 14장으로 넘겨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역시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를 등장시켜 바울이 치유하는 내용으로 재서술한다.
사도들조차 가지 않는 사마리아 땅에 빌립 집사가 내려가 전도에(8:5) 성공한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 사도들 귀에 당도하자(8:14) 그들 중 베드로와 요한이 맨발로 달려 내려간다. 이때 마술사 시몬이 등장 (8:18) 사도들 안수식에서 조우한다. 그 대응 장면을 13장으로 넘겨 바나바와 바울이 구브로에서 전도하는 스토리로 엮는다. 키프로스 섬 살라미스항에 도착하여 내륙을 관통, 대척지점 파포스에 이르자 역시나 유대 거짓 마술사 바예수가 나타난다(13:4-6). 이런 패턴을 누가는 이야기 종반까지 이어나가며 행전의 들보 위에 서까래를 얹어나간다.
3중 구조 - Y축
베드로와 바울의 대조 장면을 곳곳에 분산 배치한 후 누가는 새로운 섹션을 기획한다. 1장 8절 근거, 지리적 확산에 따른 구조 분석이다. 복음이 핏줄처럼 퍼져나가는 지리적 확산을 상상하며 전체를 셋으로 나눠 복음이 퍼질 수 있는 곳까지 그려나간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는 외관상 네 구역으로 보이나 원문(영어)을 보면 전치사를 사용, 셋으로 구분한다.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 of earth.
예루살렘 복음을 7장까지 먼저 넣는다. 유대와 사마리아 복음은 다섯 장으로 한정하고 12장에서 마친다. 2중 구조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셈이다. 결국 땅끝까지 가는 복음이 핵심이다. 13장부터 써나간 이 부분은 28장에 이르러 막을 내린다. 2중 구조에서의 후반부 전체가 3중 구조에서 땅끝까지 가는 복음과 함께 진행되어 간다. 바울이 로마에서 서바나까지 갔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어도 당시 로마는 세상 전부요 경계는 어디든 땅끝이다. 복음이 땅끝까지 확산되었음을 저자 누가는 복음의 지리적 확산에 대한 진술로써 서두에서 (1:8)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6중 구조 - Z축
누가는 행전 전체를 구축하는 마지막 골격으로 여섯 요약문을 투입하여 완성한다. 유사 내용의 문장을 여섯 번 반복, 예루살렘부터 로마까지의 복음확산을 새로운 도약 (성장 발전 증가)으로 구성한다. 행전은 사도와 교회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회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 복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1)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성장하다 1:1-6:7 /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2) 복음이 핍박을 이기고 사마리아로 가다. 바울이 부름을 받다 6:8-9:31 /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 베드로가 고넬료를 변화시켜 안디옥에서 교회가 세워짐으로 복음이 이방의 빛이 되다 9:32-12:24 /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4)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과 사도회의 결과로 복음은 하나의 교회 안에서 유대인 이방인을 결합시킨다 12:25-16:5 / 행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5) 바울의 2차 3차 선교여행으로 복음이 마게도냐, 아가야, 아시아로 퍼져가다 16:6-19:20 / 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6) 복음이 권세와 있는 자 앞에서 로마에 증언되다 19:21-28:31 / 행28:31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6장 9장 12장 16장 19장. 완전하지 않으나 균등 분할하여 두 개의 핵심어 '말씀과 교회'를 교대로 투입, 전체에 고루 배분한다. 마지막은 열 개의 장을 할애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 곧 교회를 세우는 말씀과 복음을 땅끝 로마에 전파하는 순간으로 극적 묘사한다. 하나님을 향한 감격을 거침없이 쏟아붓는다. 대단원이다. 사도들이 실패한 것 같은 그 터 위에 새로운 구원 역사를 구축한다. 나는 이 엔딩 대목에서 늘 감동한다.
-미주장신대 신학생 장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