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Photo : 기독일보) 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영성 계발에는 많은 위험 요소가 있다. 영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영"(spirit)이어서 각 사람들이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꿈에 무엇을 보았다거나 환상 중에 무엇을 보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 보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무관하게 어떤 신비스런 행위로 영성을 계발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기독교 신앙 생활에 신비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 너무 집중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다양한 미신적인 행위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일부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행해지는 것처럼 건강에 위협을 주도록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오래 금식을 하거나, 신체를 괴롭히든지 고통을 자처하는 행위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는 매년 고난 주간이 되면 여러 사람이 자기 몸을 채찍으로 때려서 피를 흘리게 하며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행사를 하는데 그것도 바른 영적인 행위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학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보다는 주의 복음을 위하여 일상 생활 속에서 불편과 어려움과 박해를 견디는 것이 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소위 영성의 대가로 알려진 사람들의 다수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보편주의나 "영혼교류자" (interspiritualists)들이며, 십자가를 부인하는 이들도 많다. 십자가를 떠난 육체적 고행과 행위는 인간적인 사상에 불과하다. 십자가는 오직 주님이  지신 것이며 우리가 구속의 십자가를 질 수는 없다. 우리는 주의 복음을 위하여 어려운 길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종종 촛불을 밝히는 것, 향을 피우는 것, 묵주 사용, 베네딕트 승려의 테입을 반복해서 듣는 것 등의 "이상한" 종교행위를 격려한다. 그런 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약간의 신비감을 준다. 지금도 정교회에서는 제사장이나 신부가 기도하고 안수하면 보통의 물이 성수가 되어 신통한 힘이 생긴다고 믿는데 그런 행위는 자칫 우상숭배가 된다. 심지어 새 자동차를 사면 사제가 거기에 소위 성수를 뿌리면서 교통사고가 나지 않고 차가 잘 달리도록 하는 종교행위를 하는 것을 본다. 얼마 전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에 어느 성전에 가 보니 수 많은 성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사진 앞에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것은 마음에 위로를 줄 수 있는지 모르나 모두 성경적인 영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가벼운 최면술, 명상, biofeedback(생체 자기 진단법), day dreaming, 최면 상태 등을 통해서 심리적(psychic) 또는 마술적인 행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영성은 결코 마술의 일종이 아니다. 마술은 흔히 마귀의 역사인 경우가 많으며 복음에 장애가 되고 결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다. 성령의 내주로 인격적 변화가 오고 또 모든 행위의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사탄 숭배, 고대 배교주의,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자신을 비우라고 하여 마귀가 들어와 그 영혼을 인도하도록 유도한다. 요즘 건강을 위해서 많이 행해지는 "요가"는 일종의 좋은 운동방법이기도 하지만 동방의 신비주의와 힌두교와 관련되어 있어서 깊이 들어가거나 거기에 심취하면 자칫 비성경적이며 마귀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인도의 힌두교 성자라는 사람들이 요가에 익숙하여 요기(yogi)로 활동한다. 그들은 대체로 길거리에 살면서 오랫 동안 굶기도 하고 또 몸을 씻지 않아서 "영성이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영성계발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거짓 영성계발에서는 자신을 비우고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면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마치 티벳 불교에서는 오체투지를 가장 뛰어난(?) 영성 훈련 중의 하나로 여긴다. 즉 수 개월에 걸쳐서 삼보 일배 또는 오보 일배를 하며 도로와 산과 들을 통과해서 신체적 고행의 길을 간다. 그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과 결별하는 자아훈련의 일종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하다가 죽은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일전에 한국의 모 방송사에서 그들을 따라가며 촬영하여 기록 영화로 방영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 철저하게 자아를 버리면 깊은 불심이 생기며 나중에는 살아있는 부처 즉 활불이 된다는 가르침같은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영성과 전혀 무관하다. 우리는 비록 성령이 충만해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여전히 많은 것이 연약한 존재로서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사람일 뿐이다.

또한 동방종교의 이른 바 "초월명상" (Transcendental Meditation, TM)은 성경의 영성과 다르다. 일부 동방종교에서는 약 20 분 정도만 깊이 명상하면 세계관이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가르친다. 즉 명상을 통해서 신과 직접 대면하며 신의 실재적인 임재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점쟁이가 눈을 감고 얼마 동안 이상한 주문을 외우거나 접신한 후에 점을 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와 달리 기독교의 묵상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동방 종교는 세상과 결별하게 하고 하나님을 부인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한다.

흔히 마귀와의 접합으로 보는 신접함(trance), 최면술, 강신술, 관상기도, "집중기도"(centering prayer)는 일종의 최면이며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대단히 위험하다. 이것은 힌두교의 기도인 "만트라"(Mantra)를 통해서 같은 기도를 수 없이 반복함으로 자아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도록 한다. 만트라는 흔히 요가, Zen, 힌두교, 및 초월명상에서 사용된다.

영성에서 부분적으로 신비적인 것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비록 사람의 목소리처럼 귀로 들리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 속에서 듣기도 하고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 또는 자신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영적 훈련도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환상을 보거나 이상한 체험을 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인 것으로 여기는 것을 보며 또 환청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이 신비한 방법으로 말씀하실 수 있지만 그 말씀의 근거가 성경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마무리

이제 영적 계발의 성패는 배우고 깨달은 사실을 어떻게 실제로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몇 가지의 실제적인 결단을 제안한다. 즉 매일의 경건생활에 관하여 실제적인 계획을 세워라. 성경 읽기와 기도생활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교회 안팎에서의 봉사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앙적인 교제에 관하여 누구와 어떤 형식으로 신앙적 교제를 나눌 것인가? 나의 가정생활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가? 나의 헌금생활은 자녀들에게도 가르칠 만큼 바람직한가? 건강관리에 대하여 무엇부터 실천할 것인가? 빌리 그래함 박사는 매일 세 가지의 "운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즉 신체 운동을 위해서 매일 걸었고, 정신 운동을 위해서 양서를 많이 읽고,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성경 읽기와 기도생활을 꾸준히 했다. 이런 것들 외에 자신의 영적 계발을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을 적고 오늘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