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큰 아들에게 가셨던 8순 어머님이 부산으로 돌아 왔습니다. 말년을 큰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 보내려 했던 어머니의 야심찬 계획을 접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모교회(母敎會) 옆에 작은 방을 얻었습니다. 어머니의 이런 결정에 우리 오형제들이 화상통화를 하며 비상(?)대책 회의를 했습니다. 어머님이 큰 혼란을 각오하고 새 삶을 결단한 이유가 하나만은 아니지만 중요한 이유가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고향 교회에서 마음껏 예배드리기 위해서 부산행을 단행하신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예배는 주식(主食)입니다. 신앙인은 예배를 통해 영적 삶이 가능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험케 하고, 영적 성장과 영적 치유를 제공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참 신앙인은 예배 없이 살수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종교 활동을 말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예배를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 예배를 황제 모독행위로 금지했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형을 당하면서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하 땅굴 카타콤에서 처절하게 살면서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예배입니다.
한국 교회도 치열하게 예배를 지켜왔습니다. 일제는 총칼로 예배를 막았지만 성도들은 굴하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드리다가 감옥을 갔고, 예배드리다가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6.25 공산치하에서도 예배를 쉬지 않았습니다. 예배드리다 많은 성도가 순교했지만 예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일본순사가 공산당이 마을 전체를 괴롭혔지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예배가 화두다. 자유로운 예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다소 무리하고 무분별한 예배 강행 사례도 나타나고 여론의 질타를 당하기 합니다. 또 정부나 국가기관이 무리하고 무례하게 예배를 간섭하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행정조치를 합니다.
방역에 협조하지 않아 사회적 부담이 되고 이웃의 피해를 주는 교회의 행태에 아쉬움이 많습니다. 더불어 방역과 안전을 구실삼아 쉽게 예배를 통제 할 수 있다는 당국의 발상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신앙감수성과 인권감수성의 부족입니다. 행정당국은 교회들에 예배를 자율에 맡기고 더 철저한 방역 요청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배를 막는 것은 위헌입니다. 출석 성도 1만 명인 그레이스 교회는 예배제재의 불법성에 대해 소송을 해서 승소했습니다. 이 교회는 보수주의의 리더 죤 맥아더 목사님이 담임목사입니다.
인간은 주식(主食:Staple)에 집착합니다. 특별한 상황에 몇 끼는 대체가 가능하지만 주식(主食)없이 장기간 살면 부작용이 따릅니다. 전쟁터에서도 주식을 공급합니다. 그래서 전투식량도 주식으로 만듭니다. 필자는 군종목사시절 긴 출장에 쌀 한 톨 김치 한 조각 없이 지낸 적이 있습니다. 2주가 한계였습니다. 2주를 주식 없이 지내니 몸살을 앓았습니다. 마침 동두천에서 근무했던 미군 장교가 펜실베이니아 시골 타운의 모든 마트를 뒤져서 구한 김치와 컵라면을 먹고 저절로 나았습니다. 주식(主食)은 이런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전투식량으로 주식을 보장하듯 전장(戰場)에서 예배가 보장됩니다. 그래서 인권 선진국은 군종제도를 도입해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예배를 보장합니다. 국제사회는 제네바협정으로 전쟁포로들에게도 예배를 보장합니다. 주식인 예배는 잠시 약식 혹은 특별한 방식으로 드릴 수 있으나 예배의 장기간 금식은 불가능합니다. 주식인 예배를 취하지 못함으로 성도와 교회가 고사당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가 아무리 심해도 식사를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생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논리로 코로나가 아무리 심해도 예배를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 당국자들이 신앙 감수성이 있었더라면 쉽게 예배를 통제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국이 예배를 통제하려하지 않고 예배의 철저한 방역을 부탁 했더라면 반응도 결과도 달랐을 것입니다.
한편 성도와 교회도 코로나 방역에 더 적극적이면 좋겠습니다. 자신과 교회를 위해 철저히 방역하고, 나아가 이웃과 수고하는 의료진을 위하는 마음으로 제한된 예배를 기쁨으로 드리면 좋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주식인 예배를 양보하는 특별한(?) 금식이 필요한 시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강요에 의한 금식이 아닌 자발적 금식을 결단할 더 좋을 것이다.
어머님 얘기를 잠시 나누려 합니다. 어머님은 다 갖춰진 서울 생활에서 힘들고 어려웠는데 부산 생활을 즐깁니다. 제한이 있지만 동료 권사님들과 예배를 드렸답니다. 담임 목사님께 심방예배를 요청해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아들보다 젊은 담임 목사님의 심방을 받고 흥분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배를 회복한 노모의 행복을 느끼면서 다시 예배가 주식임을 생각합니다. 모쪼록 자유롭게 예배할 날이 속이 오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