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회에서 성윤리가 붕괴되어온 역사는 오래되었다.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일부 사람들은 성적 쾌락을 위해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나쁘다고 꾸준히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 왔다. 그러나 역사상 인류의 수많은 성현들이 쾌락의 자제를 요구하였고, 사람들이 "불만"스럽지만 이를 따름으로, 사회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발전하여 왔다.
문화인류학적 연구에 의하면 아프리카나 남태평양 섬들에 남아있던 원시문화에서도 일부일처제가 지배적이라 한다. 세계의 모든 고대 문명의 모든 종교들도 한 결 같이 일부일처제에 기초하는 성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특히 기독교는 그리스-로마의 문화의 성적 타락을 억제함으로 유럽 문명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 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서구의 머리 좋은 천재적 지식인들이 교회의 억압에 반감을 가지고 보통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성욕의 자제에서 벗어나라고 유혹해 왔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그리스 신화의 에로틱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타냄으로 간접적으로 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17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계몽 사상가들이 노골적으로 교회의 통제에 반발하는 사상을 보통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하였다. 그 결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많은 교회는 파괴되고 많은 성직자들을 살해당했다.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 대신 인간 이성을 신격화하고 숭배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를 이신론(Deism 理神論)이라 하다. 그러나 그 혁명은 불과 십여 년 만에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막을 내렸다.
그 프랑스혁명을 옹호한 대표적인 계몽사상가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 였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 역사가, 저술가 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 비판과 위트 넘치는 글로서 유명하였다. 그의 평생은 박해, 감옥, 망명, 유명인, 방탕, 러브 어페어, 그리고 왕과 교회와 비평가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실제 볼테르의 계몽주의적 자유사상은 부분적으로 쾌락주의적 도덕성(hedonistic morality)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쾌락주의(hedonism)은 그의 외설적 시에서 에로티시즘과 풍자로 잘 드러나고 있다. 볼테르는 성적 자유를 통한 철학적 자유를 설파하는 철학적 방탕사상(libertinism)을 전파했다. 그의 실제 삶도 "행복한 방탕자(자유사상가) 인격"(a happily libertine persona)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 신체적 쾌락을 옹호하였고, 나아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려는 쾌락주의의 윤리를 옹호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통 기독교의 억압과 금욕이라는 반인간적인 요구에 반대하였다. 그는 빈번하게 보수파 정치집단에 의해, 방탕자로서 자유주의 사상과 반기독교 사상으로 프랑스를 오염시킨다는 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왜 쾌락주의를 계몽사상으로 포장하여 나타내었는가? 다음호에도 설명되겠지만, 대개 성혁명가들의 성혁명 사상은 개인적 과거사와 관련되는 수가 많다. 볼테르도 자신의 고백으로는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그는 부모가 원치 않은 병약하고 못돼먹은 아이였다고 한다. 그의 전기들이 언급하기 꺼려하는 불편한 사실 중 하나는, 볼테르가 어릴 때 아동 성학대의 피해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 예수회가 운영하던 명문학교에서 교육받을 때 어른으로부터 bugger(항문성교를 의미)를 당했으며, 평생 이를 잊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시 동성애에 대해 프랑스어로 'sodomy', 또는 'nonconformism' 등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볼테르는 자신이 'nonconformism'이라고 하였다. 최근 그가 양성애자였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때의 기억으로 24세 때 그가 불행한 본명으로 살기보다 대신 볼테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 소아기 경험이 그의 이후 성적 자유주의자로 행동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런 트라우마 경험이 카톨릭교회, 특히 예수회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볼테르는 결혼하지 않았고 차례로 두 사람의 정부와 살았다. 두 번째 그의 비밀스런 정부는 그의 조카딸이었다.
아웃사이더이자 비국교도였던 볼테르는 인정받기를 경멸하면서도 이를 추구하였던 모순된 사람이었다. 생전에 그는 이천통의 편지를 썼다. 그는 무역과 복권 그리고 고리대금을 부를 축적하여 부자로 살았다. 그가 84 세로 죽게 되었을 때, 추기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 장례를 원하였다고 한다.
민성길 교수(연세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