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 안인희 역 | 문학동네 | 234쪽
모든 인생 다르지만, 자신의 길 찾지 않아
삶이란 자신이 가야 할 길 찾고 걷는 과정
아픔과 좌절, 방황과 고민 있는 <데미안>
인생에는 지도 같은 것이 없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내가 가야 하는 인생길은 저마다 다르다. 쌍둥이도 소명이 다르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다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길 역시 같을 수 없다. 인생길은 저마다 다르다. '인생 지도'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정작 자신만의 길을 찾아 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나만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유행을 선택한다. 개성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유행에 민감한 시대. 나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적은 시대다.
1919년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은 자신의 길을 걷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다.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한다."
삶이란 자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고 그 길을 걷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소설 주인공 '싱클레어'의 삶이 그렇다. 남들이 강요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찾아가기 위해 몸부림친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아픔과 좌절, 방황과 고민이 있다.
세계 깨트리는 일, 노력과 좌절, 방황과 절망
이전 가치관 완전히 깨트린 후에야 새로운 삶
질서의 세계, 가정에 무질서의 세계 시작되다
소설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깨트리는 것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좌절도 있어야 한다. 방황도 있어야 한다. 철저한 절망도 있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 그 길에서 예수를 만났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무너졌다.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은, 육신의 눈만 먼 것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무너지는 캄캄함을 경험했다. 마음은 절망이고, 이전 삶은 멸망이다. 이전 가치관, 전 세계를 완전히 깨트린 후에, 새로운 삶을 산다.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 세계가 무너지는 절망을 딛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된다. 나를 둘러싼 알을 깨트려야 새로운 살을 살 수 있다.
싱클레어가 10살 무렵.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가정이라는 알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곳에는 두 세계가 뒤섞여 있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다. 사랑과 근엄함, 모범과 질서가 있는 곳이다. 착한 어린이로 행동하면 칭찬 받는 세계다.
또 다른 세계는 하녀들의 대화 속에 있는 세계다. 도살장과 감옥에 대한 이야기. 술주정뱅이와 주먹다짐. 안정된 가정과 다른 모험의 세계다. 호기심의 세계다.
싱클레어가 10살 무렵, 자신보다 3살이 많은 프란츠 크로머를 만난다. 그는 힘이 세고 거칠었다. 크로머의 세계는 하녀들의 대화 속에 있는 세계였다.
크로머와 함께 모인 아이들은 자신들의 짓궂은 장난을 영웅적인 행동인 양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싱클레어는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를 한다. '방앗간 옆의 과수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과를 훔쳤다.'
크로머는 그 이야기를 꼬투리 잡아, 싱클레어에게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과수원 주인이 과일을 훔쳐간 놈을 알려 주는 사람에게 2마르크(200페니, 당시 10살이던 싱클레어가 가끔 받는 용돈이 5페니였다)를 준다고 했어. 그러니 나는 네가 사과를 훔쳐갔다고 말할 거야."
겁에 질린 싱클레어는 그때부터 프란츠 크로머의 손아귀에 붙들리게 된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려고 저금통을 털고, 하인들의 장바구니에서 5페니 10페니를 슬쩍 훔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정에서도 '착한 어린이 싱클레어'가 아니었다. 질서의 세계인 가정에 무질서의 세계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정이라는 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삶의 균열, '데미안' 만나고 나서 생겨
가인과 아벨에 대한 전혀 다른 성경 해석 접해
당연하게 생각하던 가치관과 생각에 균열 시작
두 번째 그의 삶의 균열은 '데미안'을 만나고 나서 생긴다. 크로머에게 시달리던 무렵,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온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전혀 다른 성경 해석을 말해준다.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가인의 표는 죄인의 낙인이 아니라 용기와 개성의 표시'라고 말한다. 기존 생각과 질서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던 세상에 새로운 균열이 생겼다.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성경 수업을 함께 듣는다. 그 과정에서 데미안에게 정통 기독교 교리와 다른 생각을 듣게 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하던 가치관과 생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학대학원 수업 때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목회자가 진리의 수호자라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가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우리를 지켜준다",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경 그 자체로 읽으라.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경을 보라. 그러면 더 많은 것이 보이게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신학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이었다. 선입견을 내려 놓아야, 진짜가 보인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성경의 가치관이 정립된다.
세 번째 균열, 기숙학교에서 '알폰스 베크'
기존 질서와 완전한 결별, 더 외로워졌지만
이상형 여성 발견하면서 방탕한 삶 정리해
세 번째 균열은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김나지움에서 생긴다. 그곳은 집과 떨어진 기숙학교였다. 그곳에서 '알폰스 베크'를 만나면서부터다.
베크는 싱클레어에게 술을 마시러 가자고 제안한다. 이후 싱클레어는 무절제한 삶으로 빠져든다. 마지 못해 술집에 끌려가는 꼬마가 아니다. 주동자가 되어 대담하게 술집을 드나든다.
어린 시절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반항심이다. 이제 완전히 기존 질서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정작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잠시, 점점 더 외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을 찾기 위해 시작한 반항은 오히려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기존 질서와 결별을 선언한 싱클레어.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방탕한 삶을 살아가던 싱클레어는 우연히 이상형의 소녀를 보게 된다. 그 소녀를 베아트리체(단테가 사랑했던 여인, 신곡에도 등장함)라고 부르며 빠져든다.
그녀만을 생각하고 그녀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결정으로 시작된 사랑. 몰두할 무엇인가를 발견한 그는 방탕한 삶을 차츰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이후 다시 데미안을 만나고,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난다. 그러면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따라 사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정한다. 비록 외롭지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기로 한다.
그 결정을 에바 부인에게 격려 받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남들이 강요한 삶, 다수결이 강요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에서, 도덕적 삶에 대해서도 도전한다. 피스토리우스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싱클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음악은 도덕적이지 않아서 좋습니다. 도덕적인 것 때문에 늘 괴로움만 겪었거든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당연시 되는 도덕적인 삶에도 질문을 던지라는 말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충분히 불편한 이야기
생각 없이 끌려다니는 도덕은 폭력일 뿐
하나님 성품과 사랑 안에서 도덕적 삶을
기독교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편한 말일 수 있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도덕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말이다. 끌려 다니는 도덕은 폭력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 도덕적 기준으로 손에 돌을 들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돌은 맹목적인 도덕이었다. 예수님은 맹목적인 도덕을 거절하셨다. 대신 도덕을 넘어선 사랑을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맹목적인 도덕은 거절하셨지만, 도덕을 패기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가는 성도는 결코 맹목적으로 도덕을 추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도덕적 삶을 산다. 말씀이라는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소설 <데미안> 이 던져주는 화두는 두 가지다. 먼저,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명이 그것이고, 구별된 삶, 좁은 길이 그런 삶이 될 것이다.
또 하나는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길을 거절하는 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아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알을 내가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알을 깨는 순간 달걀 후라이가 될 뿐이다." 생명력이 사라진다.
성도, 인생 길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
이전 삶 깨지고 새로운 소명 따라 살아가야
거룩이란 개성으로, 말씀이란 지도를 따라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면서 자기 세계를 깨는 법을 배운다. 성도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전 삶의 알이 깨진다. 어부 베드로.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자신만만하던 어부의 껍질이 깨지고, 제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삶은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여행이다. 그 길은 각자 다르다. 인생 지도 같은 것은 없다.
성도는 그 길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소명이다. 예수님을 만나 이전 삶의 알이 깨지고, 새로운 삶, 소명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다.
그러니 성도는 세상이라는 유행을 따라 살지 않는다. 거룩이라는 개성을 가지고, 말씀이라는 지도를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게 주어진 길을 간다, 소명을 따라 산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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