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의 교회사적 기원인 회중정치 체제의 한계
'흔들린 충성, 그 날의 총성': 김재규(김규평)는 유신 체제를 끝장낸 순교자인가?
이번 주 박욱주 박사님의 영화평론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4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The Man Standing Next)>에 대해 살펴봅니다.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10.26 사태 전 40여일간을 돌아보는 이 영화는 이병헌(김규평), 이성민(박통), 곽도원(박용각), 이희준(곽상천), 김소진(데보라 심) 등의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우민호 감독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이병헌·조승우 주연의 <내부자들>과 흥행에 실패한 송강호 주연의 <마약왕>에 이어, 이번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편집자 주
정권과 시민: 오늘날 민주주의 성숙도를 결정하는 '시민의 불복종' 정신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0.26 사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재규(작중 김규평)가 벌인 암살 사건의 주된 이유로 부마 민주항쟁을 지목하고 있다.
작중 김재규는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학살극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신의 안녕과 권세를 포기하는, 고뇌에 찬 양심적 군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김재규는 10.26 사태를 둘러싼 자신의 재판 과정에서, 거사를 벌인 이유로 일관되게 부마 민주항쟁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거론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진술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역사적 변명과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무엇보다 김재규 스스로가 1972년 유신체제 확립의 주모자이자 일등공신이었을 뿐더러, 그 이후 국가 요직을 독점하며 권력의 '단맛'을 무한하게 누린 인물이었다는 점이 문제시된다. 그의 삶의 궤적과 재판에서의 증언이 서로 크게 어긋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과도한 미화 의도를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이 점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극명하게 나누는 주된 요소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는 김재규라는 인물이 대통령을 암살하게 된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의도에도 큰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엄밀히 말해 민주화 운동 역시 절대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신독재 시절, 그리고 이어진 제5공화국 군사독재 시절 뭇 대학생들과 청년층(현재 586세대)이 독재에 저항한 방식은 시위였다.
당시 시위는 처음에는 대개 평화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다, 시위 진압 방식이 격화되면서 시위대 또한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시위 대부분은 시위 참여자들과 진압대 간 폭력 대결로 격화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 및 시위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근거들은 다양한데, 역사적 측면으로 보면 18-19세기 유럽 시민혁명의 모델을 따르는 것이고, 사상적 측면으로 보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로 대표되는 '시민의 불복종(Civil Disobedience)'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미국 생태주의 문필가이자 철학자인 소로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민주 정권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정권으로 변모할 수 있으며, 이 경우 해당 사회의 시민들은 비폭력적 방법을 동원해 정부의 정책과 방침에 저항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소로의 사상은 민주 시민의 덕목으로서 정권의 부당한 정책이나 압제 시도에 대해 항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 경우 정권에 대한 저항 의사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의무를 제시했다.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주국가 시민들은 이 시민불복종 정신을 적극 따른다. 대다수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은 집회 및 시위의 방법으로 시작되고, 이후 치열한 투쟁 기간을 거쳐 정권의 양보나 정책 철회 등으로 결실을 맺는다.
정권과 신앙인: 민주정의 교회사적 기원과 한계
이처럼 시위와 집회를 주된 방편으로 삼는 '광장민주주의(agora democracy)'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절대 척도처럼 여겨지고 있다.
특히 시민들이 다수 사망하면서까지 독재 정권에 저항한 소위 '항쟁'들(광주 항쟁, 6월 항쟁)은 민주주의 이념의 숭고한 발현과 승리로 추켜세워지고 있다.
근래에는 이런 분위기가 개신교계 일각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한기총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화문 집회 참여 및 자극적 정치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알리고 있는 전광훈 목사는 진보 계열 인사들이 주로 활용해 왔던 광장민주주의 방책을 그대로 역이용해, 현 정권의 실책과 부당함을 널리 알리려 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의 세부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이런 광장민주주의 정신이 기독교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하나의 커다란 문제다.
광장민주주의의 스페셜리스트들인 586세대가 국정과 여론, 그리고 미디어의 주도권을 잡은 2000년대 이래, 어느새 한국 사회 전체가 '민주적으로 옳으면 절대선'이라는 단편적 이념에 빠져들어 있는 것이다.
광장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다른 한 축이자, 광장민주주의보다 훨씬 중요한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광장민주주의가 정사와 권세에 대한 불복종과 저항이라는 비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작동한다면, 대의민주주의는 합법적으로 정해진 절차에 따른 순응과 참여의 정신을 바탕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신과 무리없이 조화를 이룬다.
민주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 간의 평등을 강조한 나머지, 질서와 권위를 존중하는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민주정의 관점으로 볼 때 모든 권위와 권세는 기본적으로 저항이 가능하고 또 그래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모든 권리의 출발점은 시민과 대중이기 때문에, 이 권리를 위임받은 어떤 정책이나 정권이나 조직이라도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제한할 경우 원칙적으로 불법적인 것으로 판단돼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공동체 및 회중 치리 원리 가운데는 절대 침해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존재한다. 바로 성경에 의해 공표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다.
16-17세기 유럽 종교개혁기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서는(특히 장로교와 침례교에서) 오늘날 근현대 민주정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회중 정치 체제(congregational polity)가 등장한다.
교황이나 교권이 아닌, 성경을 바탕으로 교회 공동체 구성원 간의 평등을 추구한 이 회중 정치 체제는 17세기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던 미국 플리머스 청교도들의 공동체 치리 원리였다.
17-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오늘날 세계 침례교회 역시 이 회중 정치 체제를 고수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민주정이 마치 기독교계, 특히 개신교계에서 최고의 정치 체제로 여겨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종교개혁 당시 여러 개신교 교단들이 오늘날 민주정의 원형인 회중 정치 체제를 선택한 데는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았다.
전편의 논평에서 언급한 바 있듯, 기독교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정치 체제, 공동체 질서 체제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절대왕정이다.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임재 전까지 이 땅에 남아있는 교회의 치리 책임이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위임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하지만, 그의 직접적인 통치가 실현되기 전까지는 성경의 약속과 명령을 기준으로 인간들이 공동체 치리를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로마가톨릭 교회의 위계적, 제왕적, 권위적 치리 체제를 벗어나고자 종교개혁 교단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바로 회중 정치 제체였다.
가톨릭 교회와 같이 인간(교황)을 신격화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신앙 자유와 열심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하나의 차선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 종교개혁 역사가 가르치는 회중 정치 혹은 민주정이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완전한 교회 공동체 질서의 회복까지 '잠정적으로' 통용될 치리 형태에 불과하다.
애석하게도 계몽주의 정치사상가들은 이를 왜곡해서 시민과 대중을 지상 최고의 권위로 두는 저항적 민주정, 즉 시민혁명에 의해 정립된 오늘날의 민주정을 수립했다.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계몽주의 민주사상 내부에서는 시민과 대중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일종의 우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오늘날 광장민주주의는 이 대중 우상화의 정신을 대변한다. 영화 <변호인>(2013), <택시 운전사>(2017)를 비롯, 금번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까지, 시민항쟁과 불복종을 주제로 삼는 최근의 작품들은 권위에의 불복과 독재 타도를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한 이상적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메시지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한국 현대사에 등장한 독재자들 모두 시민들을 상대로 헤아릴 수 없는 압제와 범죄를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는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시민 항쟁과 불복종 운동을 무조건 정치적 진보이자 선으로 그려내는 행태 역시, 기독교적 정치관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인간 실존의 여러 문제들은 시민과 대중 스스로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이는 애초 시민과 대중을 구성하는 인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하고 유한한데다, 이들을 모든 권력의 출발점으로 보는 민주정 역시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정치 체제이기 때문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이와 같은 인간 현실을 과도하게 무시한 채, 진보 계열 정치인들의 주된 활동방식이었던 민주항쟁에 단지 '약간의' 보탬이 되었던 김재규의 쿠데타 행위까지 미화하는 균형감 잃은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오늘날 대세를 이루는 한국의 광장민주주의 조류와 미디어의 편향적 평가를 한꺼풀 벗겨내고, 성경의 약속과 교회사 전체를 통해 냉정하게 반성해볼 때, 결국 민주정은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히 9:10)"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