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10월 30일 개봉해 국내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제치고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Terminator: Dark Fate)>를 2주간 분석합니다. 팀 밀러 감독의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놀드 슈왈제네거(터미네이터)를 비롯해 맥켄지 데이비스(그레이스), 린다 해밀턴(사라 코너), 나탈리아 레이즈(대니 라모스), 가브리엘 루나(터미네이터) 등이 출연합니다. -편집자 주
영화 속의 종말: 헐리우드판 계시록
<터미네이터>(Terminator) 시리즈의 새 후속작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Terminator: Dark Fate)가 개봉되었다.
시리즈 제2편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 이후 여러 편의 후속작이 개봉되었지만, 이 후속작들은 감독과 출연진, 설정 변경 때문에 사실상 스핀오프(외전)나 리부트 판으로 취급되어 왔다.
반면 이번에 개봉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시리즈 원작 감독 제임스 카메론이 제작을 맡고 각본에도 참여하여, 시리즈 1편과 2편의 흐름을 '제대로' 잇는 작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 왔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서사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종결자, 처단자, 최후 경계선'이라는 의미) 인류 종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으로 등장한 인공지능이 그 창조주인 인류에게 반기를 들고, 오히려 인류를 지배하며 사냥하는 절망적인 미래 세계가 <터미네이터>의 주된 배경이다.
인류의 종말, 어떻게 보면 헐리우드의 단골 소재라 할 수 있다. 전 세계 영화계에서 헐리우드만큼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는 곳은 일본 영화계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문화적 기원을 파고들어가면 성경의 요한계시록이 나온다.
헐리우드 종말 영화 가운데 계시록의 장면들을 참고하지 않은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가 계시록이 밝히고 있는 인류 심판의 주체(하나님과 그의 사자들)와 동기(죄악의 심판과 형벌), 그리고 수단(범세계적 미혹과 재앙들)에 크고 작은 설정 변화를 주면서 서사의 큰 줄기를 형성해 간다.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대부분의 종말 영화나 드라마에서 돋보이는 바는 바로 심판의 '수단'이다. "세상은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 이 물음이 서사에 대한 관객의 호기심을 붙든다.
<터미네이터>에서는 인공지능과 소재공학을 비롯한 온갖 오버 테크놀로지들이 인류 심판에 동원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에 맞서 힘겨운 생존투쟁을 이어간다.
이처럼 인류에게 심판과 종말이 다가오는 구체적 방식에 대해 헐리우드 영화들은 여러 방향의 '개연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원작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영화화한 <오메가맨>(1971)이나 <나는 전설이다>(2007), 그리고 <레지던트 이블>(2002) 시리즈나 <28일 후>(2002) 같은 작품은 인류가 만들어낸 세균무기나 바이러스가 심판과 종말의 수단으로 소개된다.
<매드맥스>(1979) 시리즈의 경우 핵무기가 인류의 종말을 불러온다. <에일리언>(1979) 시리즈는 외계 생명체가, <아마겟돈>(1998)이나 <2012>(2009)는 전 지구적 자연 재해가, <엑스맨>(2000) 시리즈나 <어벤져스>(2012) 시리즈는 초인적 능력을 가진 빌런들이, <인터스텔라>(2014)는 환경 변화가 인류를 멸절시키는 주원인으로 소개된다.
헐리우드 외에 종말에 관한 영화를 많이 제작하는 곳은 일본 영화계이다.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션이 강세인 만큼, 종말에 관한 애니메이션 영화도 다수 존재한다.
다만 일본의 종말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주된 사상적 기원을 성경의 요한계시록에 두고 있지 않다. 물론 <에반게리온>(1995)이나 <무한의 리바이어스>(1999) 같은 작품의 설정은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일본 종말 영화 및 애니메이션 대부분의 주된 사상적 기원은 불교적-신토적 허무주의와 잦은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공지능과 종말: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 인간처럼 되려는 인공지능
다시 <터미네이터> 시리즈로 돌아와 보자. 이 작품은 '인공지능에 의해 도래하는 종말'이라는 소재를 대중문화계에 널리 전파한 주역이다. 이후 제작된 <매트릭스>(1999) 시리즈와 <아이, 로봇>(2004), <오토마타>(2014) 등은 모두 <터미네이터> 시리즈로부터 크 고작은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이 종말의 방편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동일한 종교철학적 고민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인격 창조에 대한 욕망과 피조된 인격의 위치에 관한 고민이다.
인격 창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컴퓨터공학과 로보틱스(로봇 공학), 그리고 체세포 복제 기술이 발전된 20-21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욕망은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중세에도 연금술의 도움으로 인간이 인간을 창조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파라켈수스(1493-1541) 같은 저명한 연금술사는 '호문쿨루스(Homunculus, 작은 인간)'를 만들어내는 방법과 관련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Rerum)라는 논문을 기술했을 정도이다.
왜 인류는 자연적 생식이라는 방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공적으로 인격을 만들어 내려는 상상을 했던 것일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했을 것이다. 인구가 즉시 국력으로 이어지던 시기에는 노예와 병사들을 쉽게 얻는 방법으로 인간의 인위적 창조를 상상했던 듯 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격 창조에 대한 욕망 전체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이 욕망의 기원을 온전하게 파악하려면,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욕심보다 더 깊은 층위에 자리잡고 있는 근원적 욕심, 바로 자기 신격화의 열망을 눈여겨 봐야 한다.
생명윤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기독교 윤리학자 토드 달리(Todd T. W. Daly)는 '트랜스휴머니즘과 기독교 전통 속 죽음에 대한 진단(Diagnosing Death in the Transhumanism and Christian Tradition)'이라는 논문에서, 인간이 인공 인격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지어진 피조물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이는 비단 기독교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 및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안이다.
문제는 인간의 타락, 인간의 죄성이 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는 데서 발생한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기사는 단순한 신화로 보기 어려울만치 정확하게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타락한 인간, 죄성에 깊이 물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질 수 있는 능력"으로 표상한다. 이 '하나님과 같이(sicut deus)' 되는 것에 대한 열망은 인공 인격을 만들고, 그로부터 죽음을 극복하는 방도를 찾아내려는 인간의 기술적 욕망에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달리가 설명한 바에 의하면, 인공지능 개발 노력의 이면에는 단순히 '실용적'인 욕구만 있는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신격화하려는 왜곡된 종교적 열망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인간은 오랜 세월 인간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인격을 창안해 내는 것을 신의 영역에 닿는 표식으로 삼아 왔다. 그리고 이 열망은 오늘날 테크놀로지, 특히 컴퓨터공학, 로봇공학, 생명공학, 그리고 심리학(혹은 인지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점차 그 목표치에 도달하는 현실적 결실들을 얻어내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인공지능 개발에 대한 인류 전체의 기대감, 개발자들의 기대감은 다분히 이율배반적 성격을 갖는다. 인간 스스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월권을 감행하고 그 결실에 환호하면서, 정작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를 넘보는 월권은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의 상황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는 영화가 바로 <터미네이터> 시리즈이다.
<터미네이터>가 그려내고 있는 상황은 극단적이지만, 그 본질상 크게 틀린 점은 없다. 인류는 알든 모르든 간에 인공지능 개발 노력을 통해 인간이 피조물로서 갖는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결실로 나오게 된 '인간과 같은(sicut hominus)' 인격이 그 창조주인 인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영화 <터미네이터>가 보여주는 인공지능 휴머노이드들의 반란과 지배는 인간의 자기신격화 열망이라는 죄성에 대한 SF적 보고서이자, 그 죄성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영화적 예언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감독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다분히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윤리관을 전달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