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선사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이 준수하려는 계명 중에 하나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가다가 두 선사는 불어난 개울물 앞에서 건너지 못하는 한 여인을 보았다. 한 선사가 과감히 그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넌 후 내려주고 한참 길을 가는데 한 선사가 여인을 도와준 선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의 계율을 깨었는가?" 그러자 선행을 한 선사가 말하길, "나는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당신은 아직도 그걸 생각하고 계시오?"
인간에게는 조직과 법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그 조직과 법칙이 가끔 사람을 억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하나의 명제를 세우고 진실을 말할수록 자신이 말한 법칙에서 수없이 넘어지며 상대적인 모순을 만난다. 성경에 '말하기는 더디하고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은 사람이 말할수록 자기의 말이 올무가 되기 때문이 아닌가. 삶의 공식과 법칙이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에 가서는 상황에 따라 그 틀을 깨야 할 때가 있다. 또한 평생 얻어진 자신만의 삶의 철학이 어떤 간단한 명제 앞에 무너질 때도 있는 것이다.
성경에 바울이 말한 것처럼, 제사음식이라도 믿음으로 먹을 수는 있지만 혹시 주변에 그걸 보고 시험에 빠지는 자가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은 지켜야 하되 율법주의를 경계하신 것이다. 상황윤리는 상황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의미를 던져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통 확신있게 말하는 내용들이 상황에 따라 얼마나 허구가 많겠는가. 인간은 육체적으로도 약하지만 지식과 지혜를 갖는 면에서도 대단히 취약한 면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우리가 누구를 비판할 때 과연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이 세운 명제와 윤리적, 심지어 신앙적 기준이 얼마나 완벽하다고 생각하는가. 교인들 중에 술, 담배를 하는 사람을 비판하는가. 비판하는 자신은 그 사람보다 얼마나 의롭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성경의 말씀과 같이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비판할 만큼 내 자신이 완전한 명제를 갖지 못할 뿐더러 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이유는 서로가 내세우는 불확실한 지식과 그릇된 확신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때론 종교와 신앙이란 이름 하에 즐거운 마음으로 악을 행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결국에는 율법이나 어떤 명제 이상으로 믿음과 은혜로 사는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기준을 세우지 말라. 그냥 그 사람 자체를 인정해주라. 장점과 단점을 함께 받아주어야 한다. 부분적인 단점으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지 말고 통전적인 눈으로 사람을 대하라. 그 이유는 자신도 그런 모습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인관계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 세상에서 대인관계 만큼 어려운 것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어려움의 요인을 해소하면 되지 않는가. 자신과 이웃,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편견과 나를 억압하는 모든 사고의 기준들을 과감히 깨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제 일의 계명, 사랑으로 자신의 생각을 덮으라. 그러면 자유해지고 대인관계가 원활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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