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문과 연설문을 통해 본)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김현태 | 비봉출판사 | 306쪽
"1991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현대그룹 정주영과 이명박에게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당시에는 북한이 공업이 더 발달하고 국민소득도 높았습니다. 남한은 겨우 농업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북한이 남한보다 가난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북한은 공산주의를 채택했고, 남한은 자본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논설문과 연설문을 통해 그의 사상을 분석하는 도서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진실》에 이어 이 책을 출간한 저자 김현태 선생은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책이 없었다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미군정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해방 정국에서 국민들의 사상 분포는 70% 이상이 좌익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현실 역시 가난하고 무지하여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나눠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자는 "해방공간에서 첫날 밤 조선공산당이 결성됐고, 이 외에 연안파 백남훈의 조선신민당 남한지부,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등 군소 좌익세력들이 해방공간에서 활개를 치며 선량한 국민들의 자주독립국가 건설 여망을 거짓으로 선전 선동하여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며 "그런 가운데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피나는 전쟁을 치르면서 뚫고 나가 마침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을 건국해 낸 사람이 바로 이승만 박사"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어떻게 '반공 사상'을 가질 수 있었을까? 저자는 3가지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소련공산당의 한국 독립운동 개입과 상해 임시정부에서 좌익 독립운동가들과 겪었던 일들, 그리고 패전국으로서 반으로 갈라진 동독부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폴란드까지 소련이 도미노처럼 유럽 동구권을 공산화한 과정이었다.
저자는 "이승만 박사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대륙 세력인 중국과 러시아를 택하지 않았고, 오대양 육대주를 향해 열려진 해양 세력, 즉 미국을 택했다"며 "독립운동 자금조달에서도 독이 든 소련 공산당의 자금을 거절하고, 천신만고 해가면서 자력 조달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박사는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를 비판한 논문들을 작성하기도 했다. 하와이 독립운동 시절, '태평양 잡지' 1923년 3월호에 '공산주의의 당부당'이라는 논문을 게재한 것.
이 글에서 이승만은 공산당의 '부당'한 점으로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 △자본가를 없이 하자 함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 함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정부도 군사도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 함 등을 꼽았다.
결론에서는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 하여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 하고 총과 창을 녹여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은 일심 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여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 다 밀리어네어(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고 쓰고 있다.
저자는 이 글에 대해 "공산정권 등장 6년만에 발표한 이 논문으로, 이승만 박사는 서방 진영 최초로 공산주의의 모순을 분석, 인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의 반민주적·제국주의적·전체주의적 체제의 종말을 예고하는 비판자가 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세계의 역사와 지리, 정치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폐해를 일찍이 깨닫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택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이는 후대에 사는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이자 자랑"이라며 "이승만 박사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에 매진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사생결단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책은 건국 전후 해방공간에서 공산당의 대한민국 허물기 시도들도 열거하고 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부터 국대안(國大案) 반대 사건, 9월 총파업, 대구 10월 폭동, 2·7 폭동, 제주 4·3 사건, 단독선거 반대투쟁, 여순 반란 사건, 국군 2개 대대 월북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등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위와 같은 위기 가운데서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을 제압하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6·25 남침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보존하였으며, 그 후 전화를 복구하고 인재를 길러 짧은 시일 내에 산업화를 이룰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고 강조했다.
▲이승만과 김구. ⓒ피스코리아 제공 |
자유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소련과 중공, 북한 등의 공산 세력의 불법 남침이었던 6·25 전쟁 중 일화도 전하고 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미군 수뇌부는 유엔군에 일본군과 대만군의 참전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대노했다. 이 대통령은 1951년 1월 12일 미군 수뇌부를 향해 "만일 일본군이 참전한다면 국군의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려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장개석의 자유중국군 지원에 대해서도 "한국 전선에 일본군을 끌어들일 명분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저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조처는 과거 조선 조정이 동학란을 진압하려고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이를 명분으로 일본군이 개입해 결국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전례를 상기했기 때문"이라며 "그런 이유로 유엔군이 밀리는 위기 상황에서도 일본군과 대만군의 개입을 완강하게 반대했고, 미군도 결국 이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고 서술했다.
결론을 통해 저자는 "이 지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아니라 신기루를 보고 목마른 행객은 쓰러지고 말 것"이라며 "마르크스가 목말라 하는 인류에게 보여준 공산주의는 오아시스가 아니라 신기루여서, 1억명의 무고한 인류의 피를 마시고 역사의 뒤안길로 잠시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그 유령은 언제 어디서 불쑥 머리를 다시 디밀지 아무도 모른다. 공산주의를 알고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들만 공산주의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 "이승만 박사는 일제 하에서는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치면서 공산주의자와 싸웠으며, 해방정국에서 천신만고 끝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을 건국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며 "독립운동은 그 노선이라는 그릇에 어떤 것을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가치와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이와 같이 그의 외교독립론은 해방정국에서부터 그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의 길목에서, 6·25 위란에서 대한민국을 호국하고, 서방 문명국에 유학생을 보내 선진 지식과 기술을 배워오게 하고, 국민들의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상호방위조약으로 안보 울타리를 건립함으로써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았다"며 "남이 우매하다고 여긴 그 외교독립론으로 세계를 넘어 먼 미래를 내다보았던 것"이라고 전했다.
더불어 "이러한 희대의 위인에 대해, 우리 민족은 그의 공적을 무시하고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도 있는 국정에서의 실수를 침소봉대하여 외로운 고도에서 쓸쓸히 돌아가시도록 했다"며 "오늘까지 그의 공적을 깎아내림으로써 문명인의 처신에 걸맞지 않은 행동으로 세계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 나라를 세운 건국일을 기념하지 않고, 건국의 주인공 국부를 존경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며 "이는 위인을 알아볼 줄 모르는 미개인의 소치로밖에 간주될 수 없는 일로서,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