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차이는 어디서 나는가
설교의 제 요소는 해석에 대한 통찰력, 설명의 남다름, 시대와 현실을 읽는 능력, 논리성, 사고의 힘, 스피치, 글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어떤 것이 설교에 있어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는가?
설교자마다 이 차이에 대한 생각이 다를 것이다. 필자는 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이는 '아트설교연구원'을 통해 설교자들을 가르쳐 본 경험에 근거한 결론이다.
설교자의 생각은 글에 의해 마침표가 찍힌다. 남다른 생각도 글로 표현되지 않으면, 설교 현장에서 그리 큰 쓸모가 없다.
많은 설교자들인 그 많은 생각들을 글로 쓸 것 같지만 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그들은 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무척 답답해한다. 실제적으로 자시만의 생각. 남과 다른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글을 많이 써보지 않으면 쉽지 않다.
설교의 차이는 글에서만 오지 않는다. 다른 것에서 온다. 분명한 것은 동일한 조건에서는 글의 차이에 의해서 온다.
설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글의 문제다
설교자의 가장 큰 고민은 설교의 고민이다. 한국교회 토양에서 기도, 심방, 행정 등은 누군가에게 위임할 수 있다. 설교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설교는 설교자가 한다. 설교자들은 설교를 할 때, 작성한 설교 원고를 바탕 삼아서 하게 된다.
문제는 설교 원고를 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 준비에서부터 설교 원고 쓰기에 부딪힌다. 특히 청중에게 들려지는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산 넘어 산이 될 학률이 높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한 말이 있다.
"인생은 올림픽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수로 온다. 어떤 사람은 관객으로 온다.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온다."
그렇다면 인생의 올림픽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선수인가 관객인가? 관객이 아니라 선수로 뛰어야 한다.
동일하게 설교자에게 대입해 볼 수 있다.
"설교는 삶이다. 어떤 사람은 해석 중심으로 설교를 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설교자의 도움을 받아 설교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창작해 쓴 글로의 설교를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삶에서 당신은 어떻게 설교하는 설교자인가?
남의 삶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결과로 나온 설교를 하는 자여야 한다.
설교는 궁극적으로 글의 문제다. 스스로의 글로 설교를 작성해야 한다. 만약 작성할 수 없으면 설교자로 존재하는 것이 참담할 뿐이다.
설교하는 설교자는 자신이 강단에 들고 올라가는 설교 원고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다. 이 설교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이미 알고 있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를 한 뒤 과제를 마쳤다고 한숨을 쉴 수 있다. 어떤 설교자는 하나님의 놀라움을 목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 이유는 글이 교인의 생각과 삶 그리고 신앙과 어떻게 부딪혔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 볼 때 설교 문제는 다른 문제가 아니라 글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설교의 문제가 묵상의 문제인 줄 알았다
설교자들은 설교로 인해 교인들에게서 불평이 들어오면, 그 문제는 신학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견 맞을 것이다. 나도 신학적 문제인 줄 알았다. 성경 해석의 문제인 줄 알았다. 그런데 교인들이 아니라고 했다.
그 후 내린 결론이 묵상의 문제인 줄 알았다. 나중에 교인이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럼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글의 문제였다.
필자의 설교의 문제는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적 문제였다. 즉 글의 문제였다. 필자도 그때까지 글의 문제라고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다. 오직 신학적인 문제로, 묵상을 문제로만 알고, 풀어가고자 했다.
묵상의 문제라고 생각한 뒤 묵상하는 법, 큐티 하는 법, 기도원에서 기도하기 등등 많은 방법을 찾아 헤맸다. 묵상의 문제라고 확신해 묵상을 가르치는 곳을 2년 동안 다니기까지 했다.
그것도 부족한 것 같아, 혼자 묵상 법까지 만들며 묵상에 몸부림을 쳤다. 원인이 글이라고 발견하기까지 3년 이상 걸렸다.
교인들이 설교가 들려지지 않는다고 할 때, 교인들은 글의 문제임을 알고 있다. 단지 설교자만 모를 뿐이다.
한 번은 친구가 자신의 설교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기에 묵상의 문제가 아니라 글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줬더니, 황당하다고 했다. 그도 신학과 묵상의 문제라고 우겼다. 친구의 태도는 예전 필자의 태도와 동일했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교인이 설교에 대해 고민을 갖고 있다면, 거꾸로 접근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역발상'이란 말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역발상이다. 신학이 아닌 문학으로 역발상을 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문제의 근원을 찾는 것 쉽지 않다. 근원을 빨리 찾을수록 행복한 설교자의 삶, 예수님을 믿는 것이 행복한 교인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 앞당겨진다.
설교에 '최악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설교에 최악의 조건을 갖고 있다. 혀도 짧은데다, 말까지 빠르다. 아내가 설교할 때 입을 크게 벌리고 말을 또박또박하라고 많이 이야기해줬다.
부교역자 시절에는 최악의 조건 문제로 교인들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니, 목사님 설교를 한 달만 들어도 적응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고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고민만 깊어졌다. 이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최악의 조건인 필자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한국의 대학원에서 '스피치'를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모두 찾았다.
"찾는 자에게 열린다"는 말씀처럼,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전략커뮤니케이션학과 '스피치, 토론' 전공이 있음을 발견했다. 응시해 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서 신학교를 갔으면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최악의 조건을 가진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필자는 섣불리 지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최악의 조건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입학한 뒤에도 최악의 조건이 스트레스였다. 설교를 할 때마다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 컸다. 최악의 조건에 대해, 교인들은 위로해 주고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태산같은 걱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의 '스피치, 토론' 전공이었다.
1학기를 열심히 다닐 때였다. 자연스럽게 나의 고민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럼 선배와 후배 동료의 그리스도인 원우들이 제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목사님! 목사님의 문제는 '스피치,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의 문제입니다."
그 말은 한 분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해 주었기에, 최악의 조건에 대한 기도 제목을 응답받았다고 봤다. 필자는 모든 것을 종합한 뒤, 1학기만 마치고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가지 않았다.
필자는 '아트설교연구원'을 통해 일주일에 4회(월, 화, 목, 금) 가르친다. 한 달에 몇 번 정도하는 외부강의도 한다. '아트설교연구원' 강의는 그렇다 쳐도, 외부 강의에서도 나쁜 반응은 받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최악의 조건 때문에 반응이 안 좋아야 정상인데, 반응이 좋다는 말도 듣고 있다. 이는 스피치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를 만드는 글의 문제임을 직시해 준다.
놀라운 것은 '아트설교연구원' 회원들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래 배운 설교자는 6년을 배웠고, 3년 이상 배운 설교자는 꽤 되며, 평생 함께 하겠다는 회원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최악의 조건 문제가 아니라 조금 쓰는 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글이 설교의 차이를 만든다
얼마 전 어떤 부목사가 담임목사로부터 설교에 대해 한 마디를 들었다.
"오늘 설교에서 무슨 설교를 했나요?"
"어떤 것을 말하려고 했나요?
"서론, 본론, 결론은 무엇이었나요?"
담임목사가 설교에 대해 조언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필자는 부목사가 이런 말을 들은 것이 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위의 문제들은 글을 쓰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목사들도 담임목사로부터 한 마디 들으면, 글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자신이 설교 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았거나 성경 해석 그리고 묵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씩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오늘 설교에서 무슨 설교를 했나요?"
이는 논리성의 문제다. 설교에 논리가 없으면 무슨 설교를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결국 이도 글의 문제다.
"어떤 것을 말하려고 했나요?"
이것도 글의 문제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론, 본론, 결론은 무엇이었나요?"
이는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걸과다. 즉 글의 문제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목회자도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자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이왕이면 글을 잘 쓰면 대환영이다.
그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도 인용한다. "원본(original)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복사본(copy)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런 문제 모두 글의 문제다. 설교의 문제는 묵상의 문제나 최악의 조건 문제가 아니라 글의 문제다.
글이 설교를 만든다. 그 설교가 교인에게 들려짐과 들려지지 않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글이 안 좋아도 성령님의 역사만 있다면 들려지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설교자의 책임은 글의 문제로부터 기인한다.
설교자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교인을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교인이 설교에 감동을 받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를 제외하고는 설교자의 글에 죄우된다. 그러므로 설교 글을 쓰되, 들려지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글의 차이가 설교의 차이를 만든다.'
이는 설교자가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