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이하 연구소)가 20일 서울신학대학교 우석기념관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은 개회예배 후 '한국사회의 변화와 선교사' '한국사회의 발전과 기독교인'이라는 두 세션으로 나눠 진행됐다.
연구소장 박명수 교수는 "한국 기독교는 해방 이후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을 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 38선 이북에서 탈출한 사람들에게 교회를 통해 삶의 터전을 제공했고 수많은 교육기관을 통해 근대 시민을 양성했으며, 다양한 복지기관을 설립해 많은 빈곤 계층을 도왔다"며 "이런 측면에서 한국 기독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늘 심포지엄을 통해 심도 한국 현대사에서 기독교가 갖는 의미가 더욱 확장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첫번째 세션에서는 세바스찬 킴(풀러신학교) 교수가 "기독교 정치인과 교회 지도자는 1945~48년 미군정기에서 대한민국을 형성하기 위해 적극 활동했고,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에 복종하기보다 종교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지향했다"며 "분단의 주된 요인은 반종교주의와 완고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며 기독교인과 종교인을 국가 건설에서 배제시킨 공산주의였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인에게 해방은 정치적 사건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 자유민주주의, 사회정의에 입각한 기독교 국가를 희망하며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며 "당시 대부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로 인한 긴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익 관점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이어 "기독교인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와 협력을 시도하며 빈곤층에 대한 보살핌과 평등의 실현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여기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결합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미국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미군정에 다양한 방식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관념적 차이와 소련의 현실을 목도하고, 공산주의가 정치적, 종교적 자유와 사회적 동정심을 가진 새로운 국가에 필요한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며 "기독교인들은 38선 이남 지역의 정치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자유와 진정한 독립의 기회를 부여한다고 보았다"고 했다.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의 국제학술심포지엄이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김신의 기자 |
이연승(보스턴대학교) 교수는 "북한은 빈곤 계층을 위한 정책과 부의 재분배에 주목하여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반면, 한국 정부는 독점과 독재, 전체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 보장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농민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약속의 관계를 기초로 탄생했다"며 "미군정이 총사령관의 전직 선교 고문에 의해 농지개혁 계획을 발표했고 과도정부 때 개혁이 이루어졌다. 기독교 정치인은 민주주의의 활동의 토대를 제공했다. 국제선교협의회는 한국의 농민에게 자유롭고 민주적인 관념에 입각한 권리를 부여하면서 간접적으로 국가의 힘을 촉진했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기독교 문화의 자리를 제공했다"고 했다.
엘리슨 하가(순얏센대학교) 교수는 6.25전쟁 시기 남한에 대한 비정부 지원을 확대하기 위한 선교사들의 활동을 분석했다. 하가 교수는 "1950~1953년까지 선교사들은 전선, 전수, 정전 협상을 무대로 전쟁 계획에 참여하고, 전투에 참여했으며, 구호활동을 도왔다. 또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피시켰고, 포로에 관한 사역에 참여했으며, 정전협상에 통역자로 활약했다"고 했다.
그는 "또한 기독교는 교회, 학교, 병원, 고아원, 구호센터 등 비정부원조의 관리를 세웠고, 교회는 한국 사회 다양한 분야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현대적 한국을 재건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부상했다. 선교 활동은 전쟁뿐 아니라 전후 기독교 부흥에 있어 견고한 기초 형성에 기여했다"고 했다.
이밖에 케네스 웰스 교수(켄터베리 대학교) 가 '초기 한국 개신교인의 공동체 모델: 새로운 한국에 대한 비전과 현재적 과제'를 제목으로 윤치호, 안창호, 조만식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활동을 살폈고, 윌리엄 퓨린턴 교수(서울신학대학교)가 '하나님과 국가를 위해: 1945-1984년 미국 군목과 선교사들의 배경과 정체성 변화'를 제목으로 장로교 및 감리교 세력과 반공주의 정체성에 대해 살폈다.
두번째 세션에서 첫 발표를 맡은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는 '해방 공간의 우익 3영수와 기독교 세력'이라는 제목으로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발표했다.
박 교수는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1945년 11월 27일 기독교조선남부대회에서의 임시정부 지지, 38선 철폐 건의를 결의하며 한국 기독교는 우익세력을 공식 지지했고, 대회 중인 28일 김구는 '건국과 건교를 동시에 해야한다. 경찰서 열을 세우지 말고 교회 하나를 세우라'고, 이승만은 '신국가를 건설해야할 터인데 기초 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 곧 만세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김규식은 '불가침의 강국을 만드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된다'고 연설했다"며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은 다같이 기독교인임을 표방하였고, 이후 남조선민주의원에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규식, 총리 김구가 각각 선출됐고 기독교인들로부터 우익 3영수라는 이름 아래 환영을 받았다"고 했다.
▲박명수 교수(가운데)가 발표하고 있다. ⓒ김신의 기자 |
박 교수는 "원래 중도파 내지 중도 우파에 속했던 김규식은 중국에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함께 활동하다 탈퇴했고,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와 연대했다. 그러나 좌우합작 정책에 따라 중도파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자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는 반탁의 입장을 천명하며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됐다"며 "이승만과 김구는 해방 직후 상당 기간 비상국민회, 독촉국민회, 민족통일총본부에서 연합전선을 잘 유지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1947년 이승만이 북한의 인민정부에 외교로 맞서고자 해외에 간 상황에 김구는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위해 국내의 우익 세력을 자기 중심으로 개편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 배은희 목사와 이윤영 목사가 반대했고, 김구와 이승만을 섬겼던 기독교계 인사들은 이승만 계열로 방향을 옮기게 됐다. 이후 1948년, '통일 한국'과 '자유가 있는 남한'의 선택 문제에서 한국 기독교는 결국 김구 지지를 철회하고 이승만을 지지하게 됐다"며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처음에 세 사람을 지지했지만, 한국 기독교가 생각한 방형과 다른 정치적 입장이 분명히 들어나게 되면서 김규식과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이승만을 지지, 이후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고 했다.
이후 발표한 장금현 교수(서울신학대학교)는 "기독교인은 일제에 억눌렸던 상황에서 벗어나 종교의 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국가를 꿈꾸며 정치에 참여했다. 크게 기독교 정신에 기초를 둔 정당이나 단체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규모의 정당이나 단체가 조직될 때 합류하는 두 부류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CCI나 NSRRKI에 깊숙히 참여했다. 두 단체는 조직 과정과 활동기간이 다르지만, 공통점은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신탁통치에 대해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좌파는 신탁통지에 찬성했다. 소련과 김일성의 지시에 따른 결과였다"며 "결과적으로 기독교인들은 1946년 8월 기준 남한 인구대비 0.52%에 불과했지만 정치참여 비중이 매우 높았다. 정치에 참여한 비중만큼 기독교인의 역할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밖에 양준석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윤은순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윤정란 교수(서강대학교)가 각각 '미국과 소련의 민주주의 논쟁: 미소공동위원회를 중심으로', '해방 후 기독교 여성들의 사회참여-최매지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전쟁기 월남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의 성장'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각각의 발표 후에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박응규 교수, 성신여자대학교 김용직 교수 등 각 분야의 전문가 10명의 토론이 진행됐다.
한편 이날 국제학술포럼을 주최한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는 한국기독교사 정립과 관련한 공헌으로 지난 15일 제6회 슈페리어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