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남북교류 협력단 국제 세미나가 '치유와 화해사역을 향하여: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란 제목으로 4일 오전 9시부터 종로 4가 아트리움 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클라우디아 오스타렉 목사가 '독일의 통일과정으로 본 치유와 화해로서의 디아코니아 목회'를 발제했다. 그는 1970년대 동독에서 교회가 행했던 디아코니아 사역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는 "동독에서는 맞벌이 부부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며 "탁아시설은 사회주의 정부의 의료 지원 중 하나였지만, 엄격한 규제 하에 있었다"고 전했다. 가령 그는 "아동들은 기저귀를 찰 수 없었고, 아동들이 동시에 앉아 대·소변을 보는 '공동의 화장실 은행'은 당시 탁아시설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놓고, 그는 "사회주의 기본 개념은 국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육으로 사람들을 계몽하는 데 있다"며 "결국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리스도인인에 대한 부인 이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이 사고는 사람들 스스로를 자립하는 주체가 아닌 국가의 어떤 대상으로 규정했다"며 "집단적 행위, 엄격한 수면과 식사시간 고수, 의료검사 등이 바로 그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서독 간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어려움을 디아코니아 사역이 감소시켰다"며 "디아코니아 선교사역은 동독 사람들이 하찮은 존재로 스스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치유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Kerstin Lammer 'Trauer verstehen'(애도 이해)를 빌려 논의를 진전시켰다. 그는 "디아코니아 사역에 있어 애도는 핵심이었다"며 "동독사람들이 통일 후, 새로운 변화에 대해 감정적으로 깊이 공감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애도를 접목시킨 디아코니아 선교는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토론, 포럼, 자활 같은 사람들이 서로 경험을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동독 사람들이 통일되면서 겪은 소외, 상실감 및 분노를 표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며 "최근 독일 디아코니아 'Unerhort'는 적절한 예"라고 설명했다. 다시말해, 그는 "동독사람들이 혜택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했다는 감정을 이 캠페인은 사회적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 적극 경청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촉구했다"며 "이런 공간의 창출이 디아코니아 사역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동독사람들이 과거의 삶, 그것이 긍정이든 어두운 면이든 적극 이야기 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도 포함된다"며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고 보듬으며, 이를 싸 메어 가는 과정"을 긍정하면서, "사람들이 기억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끝으로 그는 "디아코니아 선교는 노동 혹은 자발적 헌신을 위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결국 디아코니아 선교의 목적은 자립을 돕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여 그는 "동독 사람들이 통일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새로운 삶을 형성해 나가도록 격려하고 옹호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논찬자로 이승열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이 나섰다. 그는 "89년부터 95년까지 괴팅엔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독일 통일을 목도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서독 교회의 디아코니아 사역에 있어 보충성, 연대성의 원칙을 내세웠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보충성 원칙이란 정부가 직접 사회적 과업을 도맡는 게 아닌, 이를 이행할 수 있는 주체를 찾아내는 것"이라며 "이는 교회 혹은 NGO가 될 수 있음"을 밝혔다. 또 그는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되, 원하는 방향으로 강제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동독교회가 디아코니아 사역을 했을 때, 서독 교회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며 "빌리브란트 서독 수상의 동방 정책으로, 동독 지역의 경제개발 및 난방, 휘발유, 자동차, 인적 물적 등을 지원받았다"고 역설했다. 이른바 그는 "독일 서독 정부가 서독의 교회를 지원했고, 서독 교회는 동독 교회와 연결돼 자연스레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이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화해와 치유 용어를 쓰면서, 동독 사람들이 마주했던 불이익, 소외 등을 말하면서, 애도이해를 디아코니아 사역에 접목시키는 게 좋았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유학 시절 경험을 빌려, 그는 "유학 시절 냉장고 수리 알바를 했다"며 "당시 월급에서 '동독 개발 기여금'이라는 세금이 따로 빠져나갔다"고 술회했다.
이에 클라우디아 오스타렉 목사는 "1970-80년대 서방교회들이 교회를 통해서 동독에 많은 예산을 지원했다"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많은 사람들이 통일 연대 세금을 지불했다"고 강조했다. 이는 "동독 사회를 재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며 "세금은 당시 동독 재건에 중요하게 사용됐다"고 평가했다.
(왼쪽부터) 이승렬 목사, 클라우디아 오스타렉 목사, 폴 최 목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청중 질문도 이어졌다. 한 청중은 "동·서독 통일은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 했다는 데"에서 "현재 한반도 통일 과정과 다르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한 쪽이 우위에 있는 통일 방식은 옳지 않다"며 "한반도 통일 과정에 있어, 서로 존중하는 평등 개념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여 그는 "동·서독과 달리 한반도는 두 개의 헌법이 존재하는 남·북한의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그는 "동·서독과 한반도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며 "한반도 통일에 있어 전문가는 바로 여러분"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당시 동·서독간 협력 관계는 밀접했는데, 특히 교회가 이런 가교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분단 독일에 있어서 교회는 하나였다"며 "청년, 나이든 세대들 사이 간 교회를 통해서 큰 협력 관계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서독에 있으면서 젊은 신학생들이 동베를린에 가서 협의회를 할 수 있었다"며 "서독 교회들이 동·서독 통일 시점에서 동독 교회와 자주 만나 생각을 같이 하고, 띵크 탱크를 만들어 공통의 비전을 형성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다른 추가 질문도 있었다. 그는 "현재 동서독이 분단 된 후, 동독 사람들 감정이 더 안 좋아 졌다"며 "지금도 '동독 것들'이란 단어 사용에서 동·서독간 안 좋은 감정의 골이 있다"고 전했다.
이에 오스타렉 목사는 "독일은 너무나도 빨리 통일 된 게 문제였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동·서독이 빨리 통일되면서, 깨닫지 못한 건 동독사람들이 무얼 생각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또 그는 "동·서독 간 다른 문화권 속에 살아오면서 차이를 충분히 숙지하지 않고, 다른 시스템 안에서 협력보다 서독의 주도하에 빨리 통일을 진행시킨 점이 안타깝다"고 진단했다.
덧붙여 그는 "동·서독 국민 간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점에 대해, 어쩌면 서독 국민의 공포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서독사람들의 공포는 바로 통일로 인해 서독 경제가 어려워지고 실업자들이 많아지는 것"이라며 "자유에 대한 공통의 비전은 있었지만, 경제, 실업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것이란 걱정도 있었다"고 밝혔다.
심지어 그는 "동독 사람들 사이에는 서독이 동독을 돈으로 구입했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통일 후 많은 동독의 사람들은 경제혜택에 있어 소외됐고, 알콜 중독자들이 됐다"며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 때문이며, 동독 사람들은 이에 대해 그 때도 지금도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추가로 논찬자 이승열 목사는 한 통계자료를 전했다. 그는 "통일 후 동독 사람들의 75%가 '서독이 동독을 과소평가'했다"며 "통일의 모든 과정에서 서독 사람이 중심이 됐고, 완전한 정부 통제 하에 있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동독교회에서 시작된 촛불 기도 세력들이 통일 과정에서 소외된 측면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그에 의하면, 동독 주민의 70%가 경제상황에 비관했고, 단지 22%의 동독 주민들이 통일 독일이 새로운 민주사회 시스템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동독 주민들의 73%가 불이익 당하고 있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