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크리스찬 리더십 컨퍼런스'가 23일 서울 정릉동 벧엘교회(담임 박태남 목사)에서 개최됐다. 컨퍼런스에서는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가 '3.1운동, 기독교,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오전과 오후 두 차례 특별강연을 전했다.
박명수 교수는 "그간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근대문명을 가져왔고 독립운동을 주도했음을 강조해 왔으나, 그 결과인 대한민국 건국은 간과돼 왔다"며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립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건립이야말로 한국 근대사의 결정적 사건이고, 근대화와 독립운동은 이를 위한 서론이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 중심의 왕조 유지 봉건 세력, 일본 중심의 식민지 세력,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세력 등의 방해를 받고 있었다"며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이를 다 이기고 민주주의 독립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해방 후 3년간의 군정 시대를 거쳐 남한 사회에 건립된 대한민국은 한편으로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조선 말이나 일제 강점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구 근대 사회와 연결시켜 놓았고, 그 기반 위에서 오늘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발전을 이룩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명수 교수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민족 국가라는 민족 공동체이자 민주공화국을 추구하는 정치 공동체라는 뜻"이라며 "민(주공화)국은 서양에서 들어온 정치 체제로, 우리나라에는 없던 말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 되는 나라로, 서양에서 만든 근대 민주주의를 계승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반도 최초의 민주주의 운동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1896년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독립협회는 배후에 아펜젤러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이 있었고, 1907년 안창호가 미국 귀국 후 세운 신민회는 독립협회와 서북기독교인들, 전덕기 중심의 상동교회 출신들이 주동해 만들었다.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미국 교포사회 대한인국민회, 상해한인교회 신자들이 주요 멤버였던 중국 신한청년당, 유학생들 중심의 일본 동경 YMCA 등 해외도 마찬가지였다.
박 교수는 "개항과 더불어 시작된 민주주의는 19세기 말 독립협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로 시작됐했고, 20세기 초 신민회를 통해 보다 진전된 공화제로 나갔으며, 한일병합 이후 미국 대안인국민회에서 본격적으로 민주공화제가 논의됐다"며 "이것이 중국 신해혁명, 일본 신자유주의,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으로 구체화됐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기독교 기관과 조직들은 이들에게 논의 공간을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누구나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있는 '종교의 자유'의 기반인 정교분리를 주장했고, 활발한 토론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회의법을 소개하는 등 민주주의의 실험장이었다"며 "교회에서 이런 것들을 배운 사람들은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특정 정치세력과 연합하는 것에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개인의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보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며 "이는 교단 자체가 정치기관처럼 행동하거나(천도교), 교단에서 개인의 정치활동까지 간섭하는(천주교) 종교들과 달랐고, 결국 수많은 목사와 평신도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하게 했다"고 풀이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 다른 단체들에 비해 일본의 간섭이 적었기에, 민족운동과 민주시민 양성에 기여할 수 있었다"며 "선교부, 선교병원, 미션스쿨, 교회 등은 미국과 관련이 있었고, 이들에 대한 간섭은 자칫 국제문제가 생길 염려가 있었기 때문으로, 당시 독립운동을 하고 시민의식을 키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고 했다.
또 "한국 기독교는 한일병합과 함께 오히려 독자적 단체로 출발하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토착화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며 "토착화의 내적 동력이 1907년 대부흥이었고, 이를 기초로 1907년 독노회와 1912년 총회가 만들어졌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국가로 전락하는 가운데, 한국 기독교는 독자적 조직과 세계를 향해 나갈 능력을 갖추게 됐다"고 전했다.
3·1운동에 대해서는 "특정 계급 중심이 아닌 전 국민이 참여한 초계급적 국민운동이었으나, 주도 세력은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신흥 시민계급이었고, 이들이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됐다"며 "이는 3·1운동의 주도 세력이 부르주아 계급이라고 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랐다"고 평가했다.
논의를 정리하면서 "3·1운동은 근본적으로 독립운동이었기에, 민족의 자존과 독립의 필요를 언급했지만 새로운 국가의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며 "3·1운동은 독립운동이었고, 임시정부 수립은 건국운동에 더 가까웠다"고 했다.
▲박명수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기독교인 중심이었고, 그 중심에 기독교 신앙이 있었음을 논증했다.
박명수 교수는 "3·1운동 이후 많은 임시정부가 출현했고,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감리회 이규갑 목사 중심의 한성임시정부였다. 이들은 민주제와 대의제를 실행해 온 기독교인들로서, 민주공화제를 추구했다"며 "그러나 국내의 임시정부 운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임시정부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상해로 몰려들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기독교인들로서 상해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임시정부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이들이 1919년 4월 11일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3·1혁명으로 대한민국이 이미 설립된 것으로 전제했고,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여'라는 표현이 들어있는데 이는 새 정부 수립에 대한 신앙적 표현"이라며 "이는 임시정부의 주역이 기독교였음을 반영해 주고 있다"고 했다.
또 "임시헌장 7조에는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해 건국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사람들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음을 다시 보여준다"며 "이들이 선출한 임시정부 각료에도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교통차장 선우혁 등 상당수가 기독교인이고, 임시의정원 부의장 역시 손정도 목사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임시헌장에 붙어 발표된 선서문 마지막 문장에는 '우리의 流하난 一滴의 血이 子孫萬代의 自由와 福榮의 價이요 神의 國의 建設의 貴한 基礎이니라'고 하여, 대한민국 건설이 하나님 나라 건설과 연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임시헌법 등으로 표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습은 민주공화국 체제였고, 이는 상당 부분 기독교인들에 시작되고 발전되고 구체화됐는데, 이는 역설적이지만 1924년 천도교 잡지 '개벽'에서 잘 나타난다"며 "이는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천도교인들까지 민주주의가 기독교에서 유래했음을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해방 후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회주의 대신 민주공화국을 지지한 것 역시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며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러한 미국적 정치 제도를 선교사들을 통해 알게 됐고, 이들이 교회나 학교에서 가르친 민주주의는 좋은 이미지로 각인됐다"고 했다.
더불어 "특히 해방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야말로 기독교 신앙을 용인하는 정치제도라고 생각했고, 이를 적극 지지했다"며 "특히 월남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수용과 민주주의를 거의 동일시할 정도로 강력한 민주주의 세력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