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백과 열정이 있는 젊은 목사를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기자는 야성을 가지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고 동분서주하는 김교 목사를 만났다. 그는 조선족 출신이다. 한국 교회의 사랑과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한국에서 신학교육도 받았다. 현재 LA로 건너와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한어권 동포들을 중심으로 전도를 하며 교회를 세워 가고 있다.
개척교회 목사이지만 김 목사는 야성이 넘친다. 사심이 묻은 인간적 도움은 단칼에 거절한다. 고생을 각오한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일 문을 닫는 한이 있어도 선교하고 구제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에 기자는 한 여름 냉수를 마시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옳고 바른 길로 가는 구도자의 야성이 있는 젊은 목사를 만나며 밝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본다.
어린 날에 품었던 영생의 소망
김교 목사는 11살에 아버님을 잃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삼촌이 복음을 전했다. 김교는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쉽게 복음을 받아 들였다. 아버님이 작고하신 후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영생에 소망을 가지고 시작한 신앙생활에 어린 김교는 솜이 물을 흡수하듯 진리를 수용하며 은혜를 받았다.
그 시절 교회를 너무 열심히 다녀 퇴학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어린 아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를 열심히 다녀서 핍박도 많이 받았다. 가까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불편해서 먼 동네 교회를 몰래 다니기도 했다. 교통도 불편한 중국 땅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하간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예배를 드렸고 말씀을 들었다.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불탔던 시절이었다.
훈련과 실습의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연변 두레마을에서 공동체 훈련을 받았다. 두레 마을 안에 있는 나눔의 집에 합류하여 신앙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시절 신앙의 본질과 신앙생활의 실제를 배웠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환상적인 믿음의 환경을 가졌다. 믿음의 공동체에서의 생활은 한국 교회를 배우고 한국 교회 문화를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울러 이 훈련을 통해서 사역자로서의 소명을 확인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의 가치를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부르심을 따라서
두레 마을 공동 생활 훈련을 마치고 상해로 옮기게 되었다. 중국 교회를 섬겼다. 하나님께서 중국 교회를 향한 마음을 주셨다. 중국 교회에서 찬송가를 인도하며 열심히 봉사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셔서 상해에서 ‘조선족 사랑의 집’ 사역을 하였다. 사랑의 집의 섬김은 종합적 사역이었다. 사람도 관리하고, 예배 인도도 하고, 심지어 설교도 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비전을 주셔서 티벳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티벳에서 건너가 사역하며 선교하는 동안 신학 교육의 필요를 느끼게 되고 신학교에 진학을 한다. 본격적으로 신학 수업을 하면서 훈련을 받게된 것이다. 김 목사는 이렇게 시작한 신학교 교육을 오래 받는다. 여러 신학교에서 다양한 신학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신학교에 재학하며 신학 수업을 쌓은 것이 훗날 김 목사가 다양한 지역에서 목회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신학교마다 할당된 지역이 있어서 특정 신학교 출신 목회자는 특정된 지역에서 목회해야 한다)하나님의 섬세한 인도하심이었다.
교회 개척과 목회
김교 목사는 상해 사랑의 집 사역을 시작으로 여러 지역, 여러 교회들을 섬겼다. 상해 사랑의 집 사역은 90여명의 성도들을 관리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비중 있는 사역이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지만 김 목사는 전심으로 목양했다. 신장이 약한 성도를 만나면 신장기증 방법을 찾았고, 간이 좋지 않은 성도를 만나면 간이식 방법을 찾았다. 나름대로 보람과 성취감도 있었고, 기쁨도 넘쳤다.
김교 목사는 개척을 4번이나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과정 과정이 하나 같이 힘들고 어려웠다. 그러나 소중하고 복된 기회들이었다. 개척의 경험을 통해서 큰 복을 받았다. 우선 김 목사 자신에게 훈련 기회였다. 영혼의 결실과 성장과 성숙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영혼의 성장을 보는 축복을 누렸다. 교회를 세우는 기쁨과 보람은 덤으로 주신 축복이었다.
개척을 하기도 하고 초소형 교회도 섬겼고 티벳에서는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신 것이요,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맘껏 누리도록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특별히 김 목사는 하나님 은혜로 젊은 나이에 큰 교회 담임 목사의 경험도 있다. 연길 조양교회에 청빙을 받아 목회한 귀한 경험이 있다.
김교 목사는 다양한 민족들을 섬겼다. 중국인을 섬겼고, 티벳인들도 섬겼고, 조선족은 물론 서울에서 한국인도 섬겼다. 각 나라 백성들을 섬길 마음을 주셨다. 지금도 조선족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개척을 하고, 정기적으로 중국인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을 인도하고 있다.
한국교회와 한국을 배우며...
김교 목사는 여러 이유로 중국의 여러 신학교에서 수학했지만 한국 신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도 가졌다.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공부할 기회가 있었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Th M)과정에서 선교신학을 공부했다. 한국 신학과 한국 교회를 이해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아울러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 교회들을 섬겼다. 부목사로 혹은 선교 목사로 섬긴 교회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지원을 받았다. 한국 미디어 선교회에서 200여개 이상의 콘텐츠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물론 김 목사 혼자서 번역한 것은 아니고 많은 스탭들과 자원 봉사자들을 통해서 번역하는 일에 총 책임을 맡아 번역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비전과 기도 제목!
김교 목사는 몇 가지 기도제목을 갖고 부르짖는다. 그냥 단순한 기도가 아니고 심장에 담고 기도하며 실제 사역과 삶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는 기도의 제목들이다.
첫째 ‘중국인 디아스포라를 섬기게 하옵소서!’ 김교목사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랐다. 중국학교와 중국 신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중국인 교회에서 목회도 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향한 목마름을 주셨다. 특히 온 세계에 흩어진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차이나타운을 간다. 잠자는 차이나타운을 깨우는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둘째 ‘조선족 교회들의 부흥을 주옵소서!’ 김교 목사는 조선족이다. 당당하게 자신이 조선족임을 밝히는 이유는 조선족에게 주신 사명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강한 조선족 교회들이 많지 않다.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김교 목사는 자신이 세워가는 월드 미션 교회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조선족 교회들을 위해 기도한다.
셋째 ‘북한 동포들을 살리는데 쓰임 받게 하소서!’ 김교 목사는 연변에서 목회하며 탈북자들을 보았다. 그들의 참혹한 현실을 듣고 그들을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그들의 고달픈 삶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 북한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방법도 모르고 방안도 없지만 기도한다. 북한 동포들을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넷째 ‘섬기는 월드미션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주옵소서!’ 김교 목사는 현재 월드미션교회 담임이다. 모든 관심과 마음이 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다. 이제 시작한 교회이지만 6개 교회들과 월드쉐어를 선교하며 돕고 있다. 교회는 선교 공동체요 사랑 공동체다. 김 목사가 기도하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사람들의 수적 부흥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교 공동체로 성장과 부흥,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로 부흥과 성장이 있기를 기도한다. 바른 교회가 되면 자연스럽게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가 이기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해서 사회로부터 빛과 소금됨을 잃어 버렸다. 김목사는 월드미션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바른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는 교회가 바른 교회다.
기자가 김교 목사를 처음 만난 날 SNS에 그날의 사진을 올리며 ‘나는 오늘 진짜 목사를 만났다’ 라고 했다. 그는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헌신하며 가난과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기자는 그를 진짜 목사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자는 김교 목사가 진짜 목사의 자리를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 월드 미션 교회가 건강한 선교 공동체로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로 굳건하게 서기를 기도한다. 김 목사가 지금의 순수성과 야성을 끝까지 지키기를 기도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