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제자를 두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떠나는 제자(요6:66)가 있고 둘째는 남는 제자(요6:68)가 있다. 전자는 오병이어의 역사를 보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나 영적인 생명의 말씀을 듣고는 예수를 떠난 제자이다(이 귀절에서는 열두제자 외에 따랐던 무리들을 제자라고 기록하였다). 후자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오병이어의 축복에 머물지 않고 영생의 말씀을 택한 제자이다. 오병이어의 복은 예수님이 먼저 무리들에게 내려준 육의 양식이다. 무리들이 먼저 원한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광주리가 남을 정도의 엄청난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들은 얼마나 놀랬겠는가.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디베랴 호수를 건너 가버나움까지 좇아올 정도였다. 예수님은 피신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가 영의 양식 때문이었다.
여기서 영적인 삶의 간단한 도식이 그려진다. 남는 제자는 오병이어의 복에도 참여하였으며 영의 양식에도 귀 기울였다. 그러나 떠난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복에는 감복하였지만 영의 양식 앞에는 무관심이었고 오히려 어려워 했고 부담스러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길,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라고 하셨다. 떠난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른 이유가 생명이 아니라 없어질 육 때문이었다. 영과 육의 분리가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다. 육의 양식에 관심이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제자이나 영의 양식이 개입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는 이름 뿐인 제자가 된다. 다시 남는 제자를 보자.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베드로는 인간을 살리는 참된 양식이 영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역사와 참된 양식인 그 분의 살과 피의 메시지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이는 기본적인 유기적 관계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필요한 양식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생명의 영적 말씀의 관계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특별히 굶주림에 처할 수 밖에 없고 세상 필요조건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서로 협력하는 관계에 있다. 베드로는 이를 역행할 뻔 했다. 눅9:33에 나오는 변화산상에서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였다. 현실과 세상 무대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총체적인 구속사역을 잠시 망각한 것이다. 바울의 세계관은 통전적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을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그 연계성을 강조한다. 우주와 민족, 사회, 개인은 하나의 집합적이고 유기적인 구성체이다. 그는 분명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영원하다고 역설하였다(고후4:18). 병행하여 그는 민족의 지도자와 나라에 바치는 국세를 언급하였다(롬13:1, 7). 또한 그는 공세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일군임을 언급한다. 즉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물질적 세계 그 자체가 영적이라거나 하나님의 나라일 수는 없다. 그러나 보이는 물질적 세계에서 사는 예수님의 제자는 그 물질을 통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간다.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 이것은 명백히 제자로서 현실의 세계를 부인할 수 없다는 영적 삶을 가르치고 있다.
필자는 많은 교회, 특히 한국 교회에서 전파되는 설교들 중 영적 삶에 대해 대단히 잘못된 내용을 발견하곤 하였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영적인 삶을 보이지 않는, 어떤 신비한 체험으로만 강조하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삶의 세계, 정치, 경제, 사회구조는 마냥 악한 것이어서 배설물처럼 여기고( 빌3:8에 기록된 바울의 의미와는 다르다) 오직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만이 성경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로 사는 이상 하나님은 그 분의 나라를 이 땅의 것과의 연계 시키셨슴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앙인은 이 땅의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도외시 하면 안된다. 사회 불의와 정부의 오도에 대해 침묵하면 안된다. 바울의 말처럼,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롬13:1)."해야 하듯이, 정부나 사회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부패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책해야 한다. 보수신앙은 오직 성경만을 말하는 경향이 있고 진보신앙은 성경보다 사회 이슈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중심으로 사회에 대한 이슈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속사와 세속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신앙인들이여, 하나님의 세계는 보이는 이웃과 물질 세계, 심지어 사회악과 구조악 속에도 개입하고 있슴을 잊지 말라. 영적인 도덕성은 곧 상식적인 인륜을 포함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