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 개봉으로, 그 원작인 일본 소설가 엔도 슈사쿠(1923-1996)의 <침묵(홍성사)>이 또 다시 큰 관심을 모았다. <침묵>은 종교 소설과 세속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으로, 17세기 박해 상황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찾아온 포르투갈 선교사의 신앙적 갈등을 밀도 있게 전하고 있다.
책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은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전체 작품들을 '흔적과 아픔'으로 분석해낸 기록물이다. 저자 김승철 교수는 감신대 신대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2001년부터 일본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엔도 슈사쿠 전문가이다. '아시아적 기독교 형성' 문제를 오래 연구해 왔다.
한 기독교 월간지에 2년간 연재했던 원고를 모아 다시 정리했다. 그는 "엔도 문학 전체를 흔적과 아픔이라는 두 축으로 볼 수 있는데, 그 흔적은 아픔이라는 흔적"이라고 말한다. 다음은 지난달 말 서울에서 진행된 김 교수와의 인터뷰.
-영화 <사일런스> 이야기부터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보셨는지요.
"감독이 굉장히 절제하고, 종교적 메시지를 가급적 억누르면서 자극적이지 않게 만든 것 같습니다. 종교 영화는 감정을 자극하기 쉬운데 굉장히 절제하지 않았나 합니다. 감독에게 실례가 될 것 같은 말이기도 한데,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이지만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됐습니다.
감독이 1980년대에 처음 <침묵>을 읽고 영화화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으로 압니다. 오랜 기간 자기 속에서 소화하고 고치고 고쳐서 나온 영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죽은 후 손에 갖고 있던 십자가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번역본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입니다. 감독이 소설의 마지막 '기리시탄 관리인의 일기' 내용까지 충실히 잘 살렸습니다."
-교수님 책에 실린 미번역분 '기리시탄 관리인의 일기'를 읽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의도는 더 밝히 알 수 있겠지만, 소설의 여운이 짙게 남으려면 읽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도 생각되는데요.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긴다거나....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읽지 않았을 경우에는, (배교) 이후 로드리고의 삶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질문이 남기도 합니다.
사실 '기리시탄 관리인의 일기'는 오늘날 일본인들도 읽기 어렵습니다. 고어의 한문투 문장들을 그대로 따 왔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이것을 읽기 어렵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암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엔도 자신은 독자들이 그것을 읽지 않는 모습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엔도가 <침묵>을 쓸 당시만 해도 고전을 많이 읽던 시기였기에, 지금과는 차이가 컸습니다.
한문투의 문장이고 저 자신이 일본문학 전공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이 쉽지 않았지만, 학자들에게 물어보면서 했습니다. 전공자들도 어려워했습니다. 자료를 찾고 찾아서 대답해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개신교 신학자이신데, 가톨릭 작가라고도 할 수 있는 엔도 슈사쿠 연구에 매진한 계기는 무엇일까요.
"처음엔 소설이 재미있어서 읽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 잘 모를 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기독교나 종교 소설이라면 호교론(護敎論·기독교에 대한 공격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것)적 소설이 많은데, 색깔이 좀 달랐기 때문일까요. 21세 때쯤이었는데, 뭔가 큰 질문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이후 엔도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001년 일본에 갔습니다. 지금 18년째인데, 일본에 있으니 엔도 작품들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방금 질문은 저 자신에게도 큰 과제였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왜 이것들을 읽어왔을까요. 나름대로 정리를 해야 하는데, 명확하게 언어화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엔도가 평생에 걸쳐 고민해 온 과제 중 하나는 '일본인인 자신이 서양의 기독교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였습니다. 기독교는 서양에서 뿌리를 내렸는데, 이 서양의 기독교가 한·중·일에 들어와서 액면 그대로 이식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했기에, 저 자신의 과제와도 맞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서양에서 왔지만, 성경이나 기독교 자체가 서양의 것인가요.
"성경 자체가 그런가에 대한 답은 어려운 부분이지만, 성경 해석의 역사는 서양의 것이었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타난 현상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서양 신학의 역사를 통해 본 정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보편성이 등장하겠지요.
역사적 우연성이나 구체성 속에서 기독교가 가진 보편성이 무엇인가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보편성은 똑같은 언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언어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그 보편성이란 무엇인가요.
"엔도의 말을 빌리자면, '타자에 대한 끝없는 관심'입니다. 엔도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발적인 세례가 아니었기 때문에, 굉장히 고민을 했습니다. 일본인인 자신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 철저하게 추구했지요.
거기서 나온 작품이 <바다와 독약>입니다. 타자에 대한 무관심은 곧 '죄'라는 주제입니다. 내가 타인의 고통을 알게 됐음에도 무관심하고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엔도가 보는 죄에 대한 자각의 출발점입니다. 죄를 자각한다는 것은 하나님 은혜가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랄까 싹을 엔도가 붙잡고, 평생 여러 장르에서 펼쳐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설 <침묵>에서 하나님은 주인공인 '로드리고'의 영혼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는 '침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말하려 했다지만,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선 어찌 생각했을까요.
"엔도는 이렇게 표현할 것 같습니다. '침묵하느냐 침묵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말하는 방식을 통해 말씀하신다'고요. 하나님은 분명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이 그를 통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지요. 직접적으로 이 질문에 엔도가 대답하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암시적이나 여러 방식으로, 그 사람 나름대로의 여정을 통해 나타나는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다 보면 '침묵'에 대해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내용은 아직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최근 기타모리 가조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 국내에서 재발간됐습니다. 따지고 보면 일본보다는 우리나라가 훨씬 고난도 많고 순교의 방식도 다양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아픔에 대한 묵상이 많지 않고, <침묵>과 같은 작품도 나오지 않고 있는데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걸어온 근대를 거시적으로 보자면, 현대화의 발걸음이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은 보다 직접적인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나라를 잃었다든지,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든지..., 그래서 보다 직접적인 대답이 필요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일본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됐지만, 서양과 대립해서 싸웠던 나라였지요. 그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소수 중의 소수였고, 드러내 놓고 자유롭게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시절이 오래 지속됐습니다. 그래서 보다 암시적이고 내면화되는 기회도 됐을 것입니다. 신앙을 자신이 충분히 소화시키는 것 말입니다.
엔도 자신도 2차대전 중에 그런 경험을 많이 당했습니다.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는 질문을 하거나, 형사가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기독교인이 있으면 신고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어느 날 성당에 있던 프랑스 신부가 헌병에게 끌려 나가는 걸 봤지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자책감이나 죄책감을 깊이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침묵>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 선교를 '늪'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로드리고'가, 그리고 2차대전 때의 엔도가 느꼈던 그 '풍토와 거리감'이 아직도 여전한가요.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중국은 전통의 많은 부분이 바뀐 반면, 일본은 불교 등 그 전통이 무너지지 않고 굳건합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통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일본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기독교를 만났던 국가입니다. 한국은 종교적 정체성이 많이 손상된 상태에서 기독교를 만났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신학자들 중 전통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불교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를 전하려는 과제를 연구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한국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동서양 간의 '거리감' 문제는 선교에 있어서도 중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거리감이 있는 게 당연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거리감을 못 느끼는 것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전통 문화와 기독교 사이에 아무런 거리감을 못 느낀다면 그것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둘째로 거리는 거리대로 두고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면 둘을 어떻게 조화시켜서 하나로 만들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 아닐까요?"
-엔도는 둘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려 시도했나요.
"그것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체험입니다. 자신을 늘 격려해 주는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서양에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 사상이 있지 않습니까. 엔도도 가톨릭 신도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교수님의 책에서 '서구의 사막성과 동양의 습윤성(100쪽)'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이는 신앙에 관련된 표현인지요.
"엔도는 흔히 '사막의 종교와 숲의 종교'를 말합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을 이야기하는 이원론적인, 신과 세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서구의 종교가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범신론적입니다. 모든 사물 속에 신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학자나 종교철학자가 아니었으므로, 단순히 대립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이 맞지 않으니, 이 이원론적 '사막의 종교'를 어떻게 범신론적 '숲의 종교'로 바꿀 수 있을까. 일본에는 신이 8백만 개나 있다는데, 이 세계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납득이 안 가는 것을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끝까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의 신앙이 약하다는 것은 비자발적인 세례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교회에 가자고 해서 갔지요. 이 비자발적 세례의 문제도 평소에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다른 입장에서 보자면, 대부분이 고민하지 않는 주제이거나 고민을 말로 꺼내지 않고 적당히 처신하는 주제이지요.
그런 면에서 엔도는 굉장히 정직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합니다. 그가 가장 부러워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결단을 갖고 신앙을 하는 이들이 굉장히 부럽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정직한 이야기이지요."
-'모태신앙'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렇게까지 고민해야 할 주제였을까요.
"엔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머니가 좋은 양복을 주셨는데 자기 몸에 안 맞아서 버릴까 하다가 벗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에 맞는 옷'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자발적 세례는 아니었지만, 신앙이 계속 있었으니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다른 사람이 주입하는 신앙을 그저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말로 표현하려는 몸부림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다른 사람이 아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정직하게 그 질문에 대면한 사람이 엔도라고 봅니다."
-후기 엔도의 작품에서 <침묵>과 같은 신앙이 여전히 남아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은 이들도 있습니다.
"엔도의 작품은 장르가 다양합니다. <침묵>과 같은 '순수 문학'이 있고, 대중 소설을 빌린 '중간 문학'도 수십 권에 달합니다. 신앙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연애소설 형식을 빌려서 쓴 것이지요. 대표적인 작품이 <내가 버린 여자>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하고싶은 대로 하다가 여자를 버렸는데, 그 흔적이 평생 남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고백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흔적을 통해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입니다. 그런 고백을 합니다.
유머가 담긴 소설도 굉장히 많습니다. <거꾸로 된 인간>이라는 소설은 남녀의 성(性)을 바꿀 수 있는 약이 발명돼 여자가 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반쯤만 바뀌어서 괴물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를 좋아하던 여자가 남자가 되는 주사를 맞습니다. '그러면 우리 둘이 맞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남자는 바뀐 후 다 버림받았지만, 이 여자만 끝까지 남자를 지킵니다.
이런 아주 간접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이야기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등이 작품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예수의 생애>의 경우,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낸 엔도의 신앙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동반자'에 대한, 그러면서도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엔도의 모든 소설은 '순문학'이라고 합니다. 그는 '순문학'을 정리하는 것이 '순수할 순(純, pure)'이 아니라 '깊은'이라고 합니다. 인간성의 깊은 본질을 건드리는 것을 순문학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장르는 순문학이라고요. 본질을 건드리는 것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질문에는 '신앙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배교와 순교는 기독교 2천년 가운데 계속된 역사입니다. 엔도 슈사쿠에게 배교란 무엇이었을까요.
"배교(背敎)란 '등진다'는 것인데, 엔도는 기리시탄 시대 고문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안 믿겠다'고 말한 이들을 배교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배교란 말 그대로 '해당행위(害黨行爲)'를 하는 것이니까요. 기독교를 버리고 공격한다든지 해야 배교인데 그런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엔도가 한 질문은 '그렇게 약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버리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밟아도 좋다'고 한 것 때문에 표면적 논쟁이 많았습니다. '순교를 안 해도 된다는 말이냐' 그런 이야기인데, 엔도가 말하려고 했던 바는 그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밟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마지막에 하는 호소라는 것이지요. '밟을 수 밖에 없는데, 밟는 나는 그럼 어떻게 됩니까? 나를 버리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던 마지막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하셨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너를 버리지 않는다'는 음성을 들었다고 해야 할까, 듣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하는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에게 '신앙'이란 어떤 의미인지요.
"엔도의 작품 중 <사무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대한 몰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외국에 가서 통상 무역을 성사시키기 위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은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7년 후에 돌아오니 일본에서 기독교가 금지됩니다. 그는 세례받은 것 때문에 처형당합니다. '나는 신앙이 있어서 받은 게 아니라 사업 때문에 받았다'고 항변하지만, '너를 살려두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그를 죽여버립니다.
그가 죽기 전 방 안에서 우두커니 십자가를 보다가, 자신과 예수가 점점 하나되는 걸 느꼈습니다. '이상하게 저 사나이와 내가 닮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엔도는 작품 속에서 신부의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례의 은총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서 사랑을 내어주십니다. 그 사람이 세례를 받은 것이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더라도, 하나님은 그 날부터 그를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신앙이라고 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나를 놓치지 않고 찾아오시는 행위입니다. 그게 평생에 걸쳐 계속되는 것 아닐까요."
-다작가인 엔도의 작품들 중, 아직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추천할 만한 작품이 있으시다면.
"말씀드렸던 <사무라이>가 있습니다. <위대한 몰락>으로 번역됐는데, 절판됐습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침묵>입니다. 많은 토론과 대화가 필요한 책입니다. '기리시탄 관리인의 일기'가 마지막에 들어있는 책으로 다시 나왔으면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저는 나고야와 동경에서 '엔도 슈사쿠 읽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나고야에선 한 달에 한 번, 동경에선 두 달에 한 번 모이는데, 5년간 50여권을 읽었습니다. 아직도 읽지 못한 작품이 있습니다. 2/3 정도 읽었습니다. 말씀드렸던 중간 소설들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많이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요."
-신앙 소설 중 추천할 만한 책은 무엇이 있을까요.
"<침묵>과 <사무라이>와 <예수의 생애>가 있고, <사해의 언저리>, <백색인>과 <황색인>도 있습니다. <만조의 시각>은 병상 체험이고, <깊은 강>도 유명합니다. 주인공인 일본인이 서양에 가서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거리감'을 느끼고 인도 갠지스 강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갠지스 강은 모든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두를 수용하는 어머니와 같은 젖줄 역할을 합니다. 종교다원주의를 표현한 것이지요.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 관련 서적을 읽고 충격을 받은 내용이 <깊은 강>에 많이 반영돼 있다고 합니다."
-그런 <깊은 강>을 읽어도 될까요.
"말씀드렸듯 '아시아가 기독교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라는 신앙적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아시아는 이미 오랫동안 종교다원주의 아래 지내왔습니다. 2천년간 기독교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실이지요.
이런 종교다원주의에 생경함을 느끼고 기독교와 관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독교 자체가 이미 유럽에 들어갈 때부터 다원화된 종교였습니다. 그곳의 토속신앙을 일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안에도 그런 이교적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게 아시아에 와서 불교와 유교와 대화하며 새로운 방향이 되는 것은, 그러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충실히 반영된 것 아닐까요.
엔도 슈사쿠 외에 일본 기독교 소설가 중 미우라 아야코라는 분이 있습니다. 둘의 색깔이 다릅니다. 미우라 아야코를 읽으면 엔도를 잘 안 읽고, 그 반대도 그렇습니다. 저는 둘 다 좋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이라도 자신의 환경적 영향이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노벨상 시즌인데요. 엔도 슈사쿠는 왜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까요.
"추측성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유사한 예를 영국 소설가 그래함 그린(Graham Greene)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엔도가 이 분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타락한 사제 같은 부분이 소위 정통 가톨릭에서 봤을 때 불편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침묵>이 처음 나왔을 때도, 일본 가톨릭계에서는 엔도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엔도는 기독교 소설가였지만, 비기독교인들 중 팬들이 많습니다. 그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읽는다기보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많이 읽어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설 <침묵>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편안한 책은 절대 아닙니다. 왜 편하지 않을까요. 고정관념을 깨기 때문입니다. 엔도는 '각자의 삶을 가지고 신을 말하라'고 합니다. 교회가 던져주는 정형화된 답이나 틀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이 신을 통해 말씀하심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100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이지요.
각자 고민해서, 자기의 언어로, 한 순간에 답을 구하지 말고, 평생에 걸쳐 신을 추구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책이기 때문에,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 그리고 생각하는 신앙으로 끊임없이 불러내는 작품입니다. 대답을 준다기보다 질문하도록 만드는 책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래 자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