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피
플래너리 오코너 | 허명수 역 | IVP | 268쪽 | 13,000원
오늘 아침 명동성당 앞을 지나는데, 지날 때마다 가끔씩 보곤 하는 흰 옷 입은 한 여인을 또 다시 지나쳐 가게 된다. 이 분은 흰 드레스 같은 긴 옷에 긴 머리를 내린 모습으로 명동성당 건너편 쪽에서 흰 천으로 가려진 커다란 짐을 캐리어 같은 것에 싣고는 중얼대며 걸어가곤 했다. 어떤 때는 뭔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세상을 꾸짖는 듯 하며 걸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명동성당 앞 인도에서 흰 천으로 가려진 짐 주변에 놓인, 꽤 굵은 쇠사슬을 풀어내며 무언가 중얼거린다. 아마도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분 같다. 아마 그녀의 외침은 종교와 관련된 내용이었을 듯 싶다.
그녀의 쇠사슬은 마치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에서 멘도자(로버트 드 니로)가 끈으로 묶어 끌고 다니던 무거운 짐을 연상케 한다. 자신의 동생을 살해한 죄와 노예상으로서 저질렀던 죄악들에 대한 죄책처럼 비춰지는 것이다. 그 짐을 끊어내지 않는 한 구원은 불가능한 것처럼, 그녀의 쇠사슬과 기행은 그렇게 보여진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짐으로 인해 더더욱 흰 옷을 고집하는 듯하다.
<현명한 피>란 책은 좀 당황스럽다. 마치 흰 옷 입은 바로 그 여인을 만나는 듯, 읽는 이들을 거북하게 한다. 책 초반부터 무언가 읽는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것이 시대적인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아니라 대사나 일어나는 사건들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기도 하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이레이저 헤드>, 아니면 라스트 폰 트리에의 <안티 크라이스트>나 <유로파>라도 보는 듯 그로테스크하고 거북하다. 그로테스크란 말은 이 책을 서평하는 이들이 여럿 쓰고 있지만, 대치할 적당한 말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
사실 이 책에 기이한 현상은 없다. 그저 기이한 사람들과 대화들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무언가 기괴한 현상들을 보는 듯하다.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인 듯 하다. 어떤 때는 일어나는 일들이 반(反)기독교적-어떤 이들은 가톨릭교도인 저자가 개신교를 비판한 것으로 보는 듯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 싶다-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또 그런 요소가 아주 없다고 볼 수도 없지만, 저자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는 않는 듯 하다.
저자는 소설의 주인공인 헤이즐 모츠와 그 주변 인물들의 충돌을 통해 '예수 없는 기독교'를 부르짖지만, 다른 한편으로 구원을 갈망하는 이의 이중적 고행과 반발을 그리고 있다.
헤이즈가 외치는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란 말 자체가 부조리하다. 비논리적이고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없는 사탄 교회'란 표현도 아니고,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 교회는 말이 되지 않는다. 또 그리스도가 없는데 거룩한 교회라는 표현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은 헤이즈의 시도가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구원을 찾지만 결국 예수 없는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지 그것을 알면서도 거부하고 반항한다. 그래서 그의 고행은 허무하다.
헤이즈의 이런 행동은 어릴 적 신앙배경 속에서 그가 당연하게 여겼고 삶의 중심으로 믿었던 신앙이 균열과 붕괴를 경험한 결과에서 빚어진다.
가장 크게는 그의 군대 복무 때문이지만, 어릴 적 아버지와 같이 갔던 카니발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 은밀한 것을 본 뒤에 균열을 겪고 거짓말하며 그 사실을 숨김에서 그가 순결했다고 믿었던 신앙에 작은 오점을 찍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신앙을 지켜 나갈 것이라 믿고 또 그 선언을 분명히 행할 것이라 생각했던 군대 생활에서 헤이즈가 신앙을 지키느냐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동료들과 그 군대생활에서 에녹이 느꼈던 것처럼, 아마 전투 속에서 적을 죽이는 경험으로 그가 신앙을 버리는 자기 몰락의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은 입술과 머리 속에 있는 신념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신앙을 갖고 자신이 속한 세상과의 부딪힘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가 그 신앙의 성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릴 적 신앙과 청년 시절 이상적인 믿음은 그 어떤 시련과 시험,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세상과 직장, 여러가지 문제들 속에서 넘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되는 경험들을 우리는 하곤 한다. 결국 그 속에서 다시 일어섬으로써 오히려 다져지는 신앙을 가지는 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믿던 신앙을 버리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저 신앙의 냉담자 또는 소극적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말한다. 믿긴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타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냐고....
그런데 헤이즈는 그러한 세상에 대한 굴복이나 타협 대신, 그가 믿고 있던 신앙을 버리고 반역을 꾀하는 듯하다. 그 연유는 자기가 믿고 있다고 믿었던 신앙의 붕괴와 죄책, 그리고 자신을 그 상황에서 구하지 않는 예수에 대한 반발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충격과 자멸은 그가 예수를 거부하고 예수 없는 교회를 세우려는 반발로 나타나지만, 그것 자체가 모순이기에 그의 모든 노력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헤이즈의 그러한 모습과 행동을 보며 주위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기는 한다. 하지만 헤이즈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그자신의 구원을 바란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에게 나아오는 이들은 무의미하고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 주변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헤이즈에게서 길을 찾고 있다. 헤이즈를 따르려던 에녹은 말라 비틀어진 미이라를 예수로 제시하기도 하고, 소녀는 헤이즈를 해방구로 여기기도 하며, 집 주인은 헤이즈를 그녀가 도와야 할 이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헤이즈를 마치 돈벌이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헤이즈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그의 반발과 무의식적인 구도가 더 중요할 뿐이다.
그는 자신만의 종교를 세우며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 하지만, 그의 과거 가족들이 죽어 관에 들어가 땅에 묻히는 것을 보았던 경험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다. 특히 헤이즈의 꿈 속에서 그가 죽지 않고 관에 묻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그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 채로 묻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그가 구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노력의 실패와 주변인들과 부딪힘 속에서, 헤이즈는 순회설교자라 믿었던 맹인이 행했던 것처럼 결국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실질적 가능성을 모두 버리는 행위를 행한다.
헤이즈는 그의 구원 없는 구원에 대한 노력에서 그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그를 선지자나 해방구로 여기거나 또 다른 이익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 앞에서 탈출하려고도 한다. 소설 속에서 그것은 두 번의 시도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 시도는 경찰관에 의해 좌절되고 눈이 먼 뒤에도 집주인의 신고와 경찰관들에 의해 다시 막히고 만다.
특히 두 번째 시도는 이미 죽어가던 상황이기도 했다. 헤이즈의 이러한 시도는 그의 부르짖음과 달리 그가 어떤 형태로든 구원과 탈출을 갈망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부르짖듯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결국 그의 그러한 행동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하셨던 말씀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그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결국 그를 아프게 하고 망칠 뿐이었다. 많은 수고를 기울이지만 무의미한 행동들이다.
이 시대에도 그런 듯 싶다. 교회에 대해 논하고 기독교에 관한 것을 비판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거부하면서도 나름의 길과 구원을 찾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들의 노력은 마치 헤이즈의 노력 같고 가시채를 차는 행동과 같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적지 않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노력도 그러한 듯 싶다. 그들은 교회를 논하고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들의 노력은 무의미하고 본질을 보지 못한다. 돌이킴 없는 구원이란 불가능하다.
문양호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