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난 다섯개의 표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으셨다면, 앞으로 등장할 두가지 표적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그를 통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임을 아실수 있으실 겁니다. 사실 성경을 자세히 묵상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도, 이런 기적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관점에서 하시는 설교를 많이 들어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합니다. 예를들어 많은 분들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자기가 먹을 빵과 물고기를 모두 드린 아이의 마음을 본받자 등의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설교를 하시지만, 사실 표적들이 담아내는 메세지는 너희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내용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 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의 눈을 뜨게하시는 표적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의 죄 때문에 눈이 멀었는지,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이 멀었는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눈이 먼 이유를 하나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함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이 구절을 읽음으로 우리는 이번 표적 역시 눈을 뜨게하는 자체가 아닌 그 너머에 더 심오한 메세지가 숨어 있음을 의식하고 읽어야 할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에서 강해를 한 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I AM" 때문에 유대인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자 몸을 피해 성전 밖으로 나가면서 끝나는 8장 다음에 붙어 있습니다. 7장과 8장에서 초막절에 대한 배경과 초막절에 있는 세가지 의식 즉 장막을 치고 사는 것, 실로암에서 물을 퍼다가 성전에 부어 흐르게 하는 것, 성전에 촛불을 가득 밝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드렸는데, 오늘 소경의 눈을 뜨게하는 사건은 그에 대해 더 깊게 설명하는 표적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9:5>
예수님은 소경을 고치시기 전에 빛으로써의 자신을 선포하시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즉 오늘의 말씀은 단순히 앞 못보던 자의 눈을 볼수 있게 해주셨구나! 정도로 끝나는 메세지가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는 세상 죄인들의 눈에 빛을 비추셔서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구원의 이야기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요한은 앞 못보는 소경이 날 때 부터 보지 못했음을 얘기합니다. 즉 예수님은 어쩌다가 눈이 멀게된 사람이 아니라 태어났을때 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 즉 다윗의 표현을 빌어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죄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볼수 있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1절에서 예수님이 태어날 때 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고 했을때에 보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에이돈(εἶδεν)은 알다, 경험하다라는 뜻과 같이 쓰입니다. 즉 예수님이 소경을 봤을때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다라는 의미보다도 그 사람을 이미 아셨으며 사실상 그 사람을 찾아갔다라는 의미에서 에이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도 몰랐고 예수님을 부르지도 눈을 뜨게 해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 입니다. 나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도 어떻게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태초부터 아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게 구원의 방법이며 이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소경을 고치실까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분께서 땅에 침을 뱉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 눈먼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내어졌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자기 길로 가서 씻고 보게 되어 왔더라. <요한복음 9:6~7>
흙은 저주 받은 죄인들과 그들의 죄를 총칭하는 소재였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일을 행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세기 3:14>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자신과 흙을 즉 저주를 섞어 버리는 것 입니다. 그리고 소경의 눈 즉 환부에 붙여져서 결국 실로암 물에 빠져서 죽는 모양으로 구원이 이루어 짐을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8장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9장에서 소경에게도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빛이라고 소개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 붙입니다. 그리고 9장에서 유대인들은 소경이 보지 못했다가 보게 된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가 네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하매 <요한복음 8:13>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에 관한 일 곧 그가 눈멀었다가 시력을 받은 것을 믿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시력을 받은 사람의 부모를 불러 <요한복음 9:18>
또 8장에서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증거하심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증언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얘기하고, 9장에서는 소경의 부모가 아들에 대해 증언하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가 나도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8~19>
그의 부모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난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요한복음 9:20>
또 8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9장에서는 눈 뜬 소경을 유대교에서 쫓아 냅니다.
8장에서는 자신을 보내심을 받은자라고 설명하시고 9장에서 소경은 예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내어졌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자기 길로 가서 씻고 보게 되어 왔더라. <요한복음 9:7>
이렇게 8장과 9장은 굉장히 흡사한 구조로 전개되는데 가장 놀랍게도 하나님께만 쓰이는 단어인 내가 그로라(에고 에이미)라는 단어를 소경이 사용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눈먼 것을 본 사람들이 이르되,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하매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는 그와 비슷하다, 하나 그는, 내가 그로다, 하니라. <요한복음 9:8~9>
요한은 지금 의도적으로 비슷한 구조와 단어들을 사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설명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즉 다른 말로 더러운 티끌과 이겨지셔서 죄인의 환부에 붙여지시고 가장 비천한 죄인의 모습이 되셔서 실로암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렇게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주님께 보내심을 받은 소경이 그대로 판박이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자가 그 눈에 진흙을 이겨서 바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소경이란 것을 세상에 광고하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낮아진 모습으로 실로암에 보내어지는 것 입니다. 소경은 자기를 보내신 분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면서 그는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을 거예요. 그리고 실로암에 도달 합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기드론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마지막으로 고여 있는 곳 즉 예루살렘에서 가장 낮은 곳을 상징하는 것 입니다. 그 가장 낮은 곳에 조롱과 멸시의 모습으로 내려가서 자기를 보내신 명령에 따라 무릎을 꿇고 눈을 씻는 것 입니다.
하늘 보좌에 있던 예수님께서 이 낮은 땅위에 보내심을 받은 그대로 내려오셔서 죄인의 추한 몸을 입으시고 침과 흙이 이겨지듯이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갖은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보내신 이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십자가 까지 지신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소경의 삶에 그대로 전가가 되고 있음을 8장과 9장의 대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즉 성도의 삶이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야 함을 그리고 그럴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것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1>
즉 성도의 삶이란 가장 낮은 실로암 못까지 가면서 그곳에서 조롱과 멸시와 비난을 들으며 그럼에도 보내신 분의 명령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며 이런 삶을 성경에서는 자기 부인의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 입니다.
그렇게 소경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 말고 자신의 율법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결국 그들에게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그가 쫓겨 남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시며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내어 믿을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날때 부터 눈멀었던 소경은 빛이신 예수님의 보내심으로 앞을 볼 수 있게되었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구원의 방법 즉 하나님의 일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눈멀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눈멀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요한복음 9:41>
예수님은 자기들이 눈멀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고 얘기하지 않고 눈 멀게 하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7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시면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햄에서 태어난다고 예언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랐음을 근거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무지에 의한 착각이지 사실이 아닌 것 입니다. 그 후에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치리자나 바리새인들 중에 그를 믿은 자가 있느냐? 오직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사람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로다, 하거늘 <요한복음 7:48~49>
자신이 율법을 잘 안다고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이 사실은 눈먼 소경과 같은 처지에 있고, 그들이 무시하고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던 소경은 예수님이라는 빛에 의해 볼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위대한 인간의 힘으로 세상의 창조도 알 수 있고 구원의 방법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 편입니까? 아니면 빛이신 말씀이신 예수님이 아니면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시는 편 입니까?
여섯번째 표적에 대한 정리
-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우리 인간이 진리와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방법을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 근처를 지나가지만 예수님이 계신지, 그 분이 누구신지 알 수도 없었고 무언가를 요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침과 흙을 이겨 진흙을 만들어 소경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물로 씻으라 명하십니다. 그리고 실로암의 뜻은 보내어졌다 입니다.
- 성경에서 흙은 타락한 인간 그리고 그 죄의 저주를 상징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저주를 연합시켜 소경의 환부 즉 눈에 바르고 그 흙이 씻겨 물에 빠져 죽어서 소경의 눈이 떠짐 즉 십자가의 복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십니다.
- 요한복음 8장과 9장에서 예수님과 소경된 자는 비슷한 일들을 겪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보내셔서 오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이 보내어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같은 길을 걸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대신 스스로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볼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의 눈을 멀게 만드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처:fingeroftho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