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적 돌봄을 위한, 애도 다루기
찰스 바흐만 | 최혜란 역 | 학지사 | 238쪽
슬픔학 개론
윤득형 | 샘솟는기쁨 | 248쪽
아내를 먼저 천국에 보내기 전에는, '애도(哀悼)'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상실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혼과 사별 등 분리의 아픔을 겪는 이들은 수많은 교인들 중 몇 명뿐이었고, 겉으로 볼 때 별다른 이상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들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쁜 목회 사역에서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비효율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작년 6월, 유방암으로 입원 치료 중이던 아내가 훌쩍 주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습니다. 아내를 보낸 후 거의 석 달 동안은 생과 사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서야 사역했던 교회에서 사별의 아픔을 겪었던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어떻게 아픈 세월을 보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 분들의 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그냥 참았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성장과 부흥이란 미명아래 아픔을 가진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가진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학문적으론 상실에 대한 자료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자들과 상담 교사들은 상실과 애도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권의 책을 중심으로 '상실과 애도의 책읽기'를 하겠습니다. 애도 관련 서적은 '애도'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수십 권에서 많게는 백 권 넘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책들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찰스 바흐만의 <목회적 돌봄을 위한, 애도 다루기(이후 <애도 다루기>로 표기)>와 윤득형의 <슬픔학 개론>은 저자들이 목회자들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충분히 재고된 책들입니다. 또한 교회 안과 밖에서 상실의 아픔을 다루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믿을만한 분들입니다. <애도 다루기>의 역자인 최혜란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지역교회를 섬기면서 '어떻게 유족을 보살필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즉각적이고 실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죽음과 관련해 애도의 의미를 밝히고, 애도와 목회자의 관계 관리를 위한 목회적 기술 및 장례식, 그리고 장의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각 장마다 실제적인 지침과 아이디어를 주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 책은 '매우 실용적인 책'입니다. 1장은 '애도의 의미'를 다룹니다.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상실의 아픔을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은, 종종 자신이 아는 교리적 지식으로 감정을 강제하거나 회피하려 듭니다. 애도자가 겪는 상실의 아픔을 어느 정도 이해만 해도 접근하기 한결 수월해집니다.
2-3장에서는 목회자의 관계와 목회적 기술 등을 다룹니다. 4장부터 마지막 8장까지는 애도자를 돕는 실제적 지침을 알려줍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윤득형의 <슬픔학 개론>과 교차 읽기를 통해 알아봅니다.
애도(哀悼)란 무엇인가?
애도는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상실을 통해 감정이 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감정에 큰 상처를 받음으로 일어나는 애통입니다. 바흐만은 애도를 '감정을 찢는 것과 같고(17쪽)', '사람을 산산조각으로 찢는 것(18쪽)'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우울증, 멍 때리기, 분노, 통제 불능의 감정 상태가 됩니다. 소화불량과 기억상실, 두통과 몸살 증세 등이 나타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 그 충격은 헤아리기 쉽지 않습니다. 스물 다섯의 아들을 보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에서 이렇게 애통하는 심정을 고백합니다.
"이제 온 세상은 달라져 보인다. 분홍빛은 자줏빛으로 변했고, 노란색은 갈색으로 변했다. 즐거운 추억이 담긴 사진들은 ... 이제 고통만 일으킨다. ... 그의 상실로 우리는 나무를 볼 수 없고, 음악을 들을 수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책을 쓸 수도 없고, 성당 사이로 걸을 수도 없고, 친구를 방문할 수도 없고, 가족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고, 교회에 갈 수 없다. 그리고 또 산에 오를 수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또는 상실은 애도자의 존재 의미를 앗아가 버립니다. 아내를 보낸 후 끊임없이 되물었던 질문은 '내가 왜 살아야 하지?'였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쩌면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기독교적 신앙이 더 그렇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39년 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동역했던 게리 크로포드 목사는 <슬픔을 순례하다>에서 고백합니다.
"아내가 사라지자마자, 함께 사랑하고 성취해 갔던 그 모든 삶도 몽땅 지워져서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극심한 허전함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경험했다. 극심한 슬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살아갈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상실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들의 슬픔은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더욱 깊습니다. 죽은 아들은 살아오지 못하고, 죽은 아내는 다시 아침상을 차리지 못하며, 돌아가신 부모님은 더 이상 자식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회복 불가능한 아픔이 고통을 줍니다.
죽음과 애도학의 대가인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애도를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로 구분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금씩 치유됩니다. 물론 완전한 치유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애도자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애도자들마다 성격과 삶의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대체로 비슷한 요법을 통해 도울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애도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애도자들은 의외로 사람 기피증이 생깁니다. 스스로 고립시킵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 줄 것을 기다립니다. 타락한 사람이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스스로 손 내밀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묻고 듣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애도자는 한결 마음 편하게 타인을 대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는 충고처럼, 그냥 같이 있는 주는 것이 최고의 위로입니다.
윤득형 목사는 알렌 울펜의 이론을 빌려와 '슬퍼하는 사람과 동반하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동반하기'는 11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조언이나 치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동반하기는 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고, 분석하지 않고 마음으로 듣는 것이며, 이끌지 않고 함께 걸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기억하기'입니다. 망자를 기억하는 것은 기억함으로 잊기 위함입니다. 강제로 기억을 지우려 하고 잊으려 한다고 잊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호에서 시신을 찾지 못한 9명의 유가족들은 아직도 팽목항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망각은 잘 보내주는 것입니다. 망자의 유품을 정리해 버릴 것은 버리고 보관할 것은 보관해 망자에 대한 기억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윤득형 목사는 책의 말미(末尾)에 '교회 안에 메모리얼 룸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애도자들은 추도예배 등의 의례를 통해 타인들이 자신들과 함께 아픔에 동참하고 있음을 느끼고 위로를 받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공동체인 교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위로가 아닐까요?
애도자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돌아갈 지혜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누군가 간절히 자신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길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정현욱 목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