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샨으로 가는 길

여리고에서 라합과 여호수아를 만나고 여리고성의 무너진 잔재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고 엘리샤의 샘물과 삭개오 뽕나무를 본 순례자는 여리고를 나와 90번 도로를 타고 계속 북쪽을 향하여 나아간다. 여리고에서 40분 정도를 진행하면 아담 브릿지가 나온다(고대에 지진으로 인해 이곳에 둑이 막히어 요단강물이 잠시 멈추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단강 도하 시 이곳에서 물이 막혀 내려오지 못하였지 않나 생각한다.) 이곳을 지나면서 차는 청룡열차를 탄 것처럼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간다. 차창 오른쪽으로는 요단강(푹 꺼져 있어 보이지 않음 벳샨 지나야 요단강을 볼 수 있다)과 너머의 요단계곡의 요르단 경작지와 성경의 길르앗 산지를 바라보며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얍복강을 지나며 계속 북진하게 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 철책선을 바라보다 보면 갑자기 왼쪽으로 아주 멋진 들판이 보인다. 길보아산 앞으로 도착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벳샨의 지경이 된다. 이스라엘 농촌의 풍요로움과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이 이곳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비옥한 농토와 스프링 쿨러를 보면서 감탄하다 벳샨 국립공원에 도착하게 된다. 쿰란에서 벳샨까지는 차로 1시간 25분 걸리는 거리인 66.1마일(99.2km)이다. 여리고에서 올라가게 되면 55.9마일(99km)정도의 거리에 있다. 만약 갈릴리 호수 티베리야에서 역으로 내려오게 되면 25.1마일(40.5km)정도가 되는데, 차로는 약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나사렛에서 이곳까지는 23.3마일(37.5km) 정도의 거리로 약 35분 정도가 걸린다. 그런가 하면 지중해 하이파로부터 오면 43마일(69.3km)로 약 57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벳샨의 역사

'샨신의 집'이라는 도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벳샨은 요단강이 동으로 2.49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흐르고 길보아산이 남쪽으로 병풍을 친듯 펼쳐져 있으며, 요단 동편으로는 우뚝솟은 고원지대의 수려함이 돋보이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벳샨은 가나안시대인 기원전 3000년에 하롯샘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따라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이집트의 침입으로 한때는 이집트의 문화와 풍물이 지배하는 시대가 있었으나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 후 이곳은 이스라엘 므나셋 지파가 차지하고 납달리 지파와는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기원전 1140~1000년 사이 사사기 시대가 이루어지는 동안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3명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 말기수아와 더불어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 죽게 되고 그들의 시신은 벳샨의 성벽에 못 박힌다. 요단강 건너편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벳샨으로 와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한 것은 왕에 대한 대단한 존경이 아닐 수 없다.(삼상31장)

북이스라엘 왕국시대에 기원전732년 사마리아의 함락과 더불어 벳샨도 앗시리아의 지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도시의 영화는 꿈결같이 사라져 가는데 이 멸망한 도시를 다시 부흥케 한 세력은 당시의 세계사 흐름을 주도한 헬레니즘의 알렉산드리아 대왕이다. 이 시대에 NYSSA SCYTHOPOLIS라고 불리우던 벳샨은 요단강 주변도시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며 발전하기 시작한다. 데카폴리스 10개의 도시 동맹 중 가장 강성한 세력을 자랑한 벳샨은 주변도시들의 맹주역할을 하며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로마와 이후 시대의 벳샨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가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서 시작되고 요단강 주변으로 10개의 도시 중 벳샨에는 제우스 주신의 신전이 건설되고 주변도시들을 영적으로 문화적으로 압박하며 대단한 기념비적 건물들을 건설하였다. 지금의 국립공원 벳샨의 유적들은 대부분 로마시대에 건설된 건물들이다.

기원후 324~632년까지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가 번성하면서 교회들이 들어서게 된다. 632년부터 아랍의 지배를 받게 된 이 도시는 결국 748년 1월 18일 갈릴리 주변의 대지진으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어지고 만다. 1099~1187년 사이에 십자군이 벳샨을 재건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옛날 북이스라엘 시대의 성터에 성채를 건설하고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이나 순례객들을 보호하는 일에만 치중하게 된다. 벳샨은 1260~1517년 마물룩 이집트 아랍시대를 거쳐 1517~1917년 오토만 터키의 지배를 받게 될 때는 아주 조그만 마을로 전락하게 된다.

◈벳샨의 현대화

20세기에 유대인 정착촌이 주변에 들어서게 됨에 따라 벳샨은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1948년에 가서야 현대 도시 벳샨이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금 벳샨은 아름다운 농촌도시로 농업과 관련된 여러 기관들이 있으며 주변의 배후 농경지에서 과학적 영농을 하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에 프로축구팀까지 있는 갈릴리 주변의 영향력 있는 도시가 된 것이다. 벳샨 동쪽에는 요르단으로 갈 수 있는 킹후세인 국경이 있어 순례객들이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오거나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넘어갈 때 편리하게 이용 하기도 한다.

바카스의 신(히랍 신화에 나오는 주(술)신)이 숭배되면서 한때는 문화의 자유를 꿈꾸었던 도시였으며 제우스를 비롯하여 태양신 등이 각축을 벌이며 인간의 자유를 신적 행위로 활개쳤던 도시, 이 도시가 로마유적의 발굴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로마시대의 유적지로 5000명이 들어간다는 원형극장과 대전차경기장공동호장실, 공동 목욕탕, 상하수도시설, 신전지대, 대로는 지금도 그 당시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벳샨의 화려함

국립공원 티켓을 끊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라. 벳샨의 역사를 알리는 플라스틱 안내도가 순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안내도를 통해 벳샨의 역사를 알 수 있고, 청동으로 된 조형물을 통하여는 벳샨의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벳샨의 화려한 로마문명은 방문객들을 시간여행 속으로 안내한다.
원형극장의 돌 의자에 앉아 누군가가 부르는 복음성가도 들어보고 음향시스템의 탁월함에 한번 놀라기도 한다.

성지순례 벳샨

그리고 옆문으로 나가 공동화장실로 가보라. 대리석으로 된 변기 모습이 신기롭다. 오물이 나가도록 밑으로 수로시설을 해놓은 것이 특이하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각종 건물들이 눈에 들어 오는데 다 돌아볼 수는 없고 멀리 산을 보라. 구약의 무대이다. 헬라와 로마 이전의 벳샨의 유적은 모두 산 위에 있다. 산 위를 자세히 보면 십자가형을 한 나무가 보이는데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을 만들기 위해 심어놓은 것이다. 시간상 산위로는 올라가지 못할 경우, 대로로 나와 기둥들 사이에서 로마의 귀족 흉내를 한번 내보고 바로 사우나탕으로 가보라. 2000년 전에도 저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사우나 시설이 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기에 규모나 장식의 화려함은 극에 달할 정도다.

고대인들은 신들에 대한 숭배로 문화와 향락으로 자유를 꿈꾸었다. 지금은 해마다 오순절이 되면 원형극장에 5,000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찾아와 이스라엘의 복음의 자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서병길 목사(이스라엘선교회)
서병길 목사(이스라엘선교회)

지형적 특징으로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따뜻한 이곳에 그리스도께서도 방문 하셨으리라 본다. 여리고나 사마리아지역을 가시려면 이곳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복음사역을 위하여 주님이 이곳을 방문하셨으리라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 물론 신약에는 벳샨에 관한 것이 구체적으로 기록은 되어있지 않지만 갈릴리 온 동네에 다니셨던 것을 보면(마 4장23절) 이곳은 큰 도시였기에 더 자주 많이 방문하셨으리라 본다. 지금도 벳샨은 예루살렘이나 사해쪽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통과하여야 하는 중요한 도로변에 놓여있다. 오직 예수로 말미암은 자유가 참다운 자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