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혁교회는 신조와 함께 세워지고 발전해 왔다. 16-17세기는 신조의 시대였다. 믿음의 선조들은 후예들이 지침을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신앙생활을 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위대한 신앙의 지침들인 '교리'를 신조 혹은 신앙고백서의 형식으로 만들어 물려주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나타난 경건주의는 '교리보다는 삶'이라고 주창했다. 교리를 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질을 위축시키는 주범으로 몰아세웠다. 18세기 들어서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개혁교회가 교조주의에 빠져 죽음의 길을 걷는다고 비판했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아예 교리무용론을 앞세웠다.
20세기에는 신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교리라는 지루하고 딱딱한 음식이 폐기되고, 입맛을 돋우는 인스턴트식의 싸구려 복음이 활개를 쳤다. 이에 대해 메이첸(Gresham Machen)은 '삶보다 교리가 우선'이라고 주창하며 다시 개혁교회의 교리를 살리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신조 및 신앙고백서 즉, 교리에 대한 거부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1세기의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는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연구하여 교리를 확립하고 교회의 개혁을 이루는 정통의 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그나마 개혁주의의 길을 걷는 몇몇 교회들을 제외하곤 대다수 교회들이 너도 나도 원칙도 없고 방향도 없는 망망대해의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교리가 아니라 종교적 감정과 생활을 더 강조한 결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들로 채워진 거대한 숲이 만들어졌다. 마치 영화 속 '영혼 없는 좀비들'이 그 안에서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포효하는 것 같다. 그 메아리들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인지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아연실색이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지키는 일에 달려 있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먹지 않고 하나님의 숨을 받아 마시지 못하면 끝이다. 교리는 성경이라는 원재료에서 추출한 영양식이다. 교리는 신자의 숨을 쉬게 하는 하나님의 산소통이다. 교리를 버리는 일은 호흡이 곤란한 환자가 산소마스크를 버리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교리무용론을 외치거나 교리가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진정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아니다.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환자를 춤추게 하는 것도 아니고, 환자를 일으켜 빨리 뛰게 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환자를 환자로 인식하지 않은 의사는 더더욱 위험하다.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부인할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우리 선조들은 바른 교리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위대한 선물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성령에 의지하여 각 시대와 나라와 전통과 당면의 과제와 처한 현실에 따라 적합한 신조와 신앙고백서들을 작성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쉼 없이 교리교육을 통해 주님이 주신 믿음을 보존하고 증거하고 전파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첫째 사명인 것이다.
교리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을 내야 하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하나는 바른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칼빈(J. Calvin)은 하나님의 교회는 교리교육이 없이 유지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는 영국의 한 성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신이 오랫동안 붕괴되지 아니하고 튼튼히 서 있는 집을 짓기 원한다면, 아이들에게 매우 유효하게 이 신앙교육서를 교육하여 믿음에 이끌어지도록 염려하고 돌볼 것"을 충고했다.
사도적 신앙과 종교개혁 신앙의 개혁교회적 전통은 성경과 신조를 함께 지켜가는 것이다. 성경 말씀의 전체 내용을 그 중요성에 따라 잘 정리함으로써 말씀의 어떤 부분이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또는 제거, 과장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 신조 작성과 교육이었다. 바른 신앙은 성경과 신조에 근거한다.
다음으로, 이단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함이다. 이단들은 늘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성경을 곡해하며, 진리의 어떤 방면을 과장하고 다른 본질적인 방면을 부정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선수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보존을 위해 각각의 모든 교리들을 정확히 규정하여 잘못 해석된 것을 바로잡고, 모든 오류를 제거하여 진리가 왜곡되지 않고 바르게 증거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프린스턴의 조직신학자였던 핫지(C. Hodge)는 "이단들은 기회만 있으면 나타나서 성경을 곡해하고 말씀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거나 멸시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거짓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지적했다. 이단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가장 유효한 대처법은 모든 성도가 교리라는 반석 위에 서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암울하다. 많은 성도들이 교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교리는 신앙생활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는 교회가 교리의 옷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이라고 오도한다.
어느새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리 없는 강단의 설교에 익숙해져 있다. 주일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예배가 아니다. 족보에도 없는 예배가 난무한다. 교인들은 한 사람의 잘 다듬어진 연사의 현란한 말솜씨에 웃고 떠들고 짜릿한 감동의 순간을 즐기기 위해 교회당을 찾는다. 이런 청중들에게 교리설교 혹은 강해설교라도 하면 모두가 하품을 한다. 마치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진 입맛이 소금 맛을 제거한 신토불이의 영양식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교리 없는 음식을 만들어 판매한 말쟁이들에 의해, 한국의 성도들은 아직도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 그들이 과연 이단들의 유혹을 견뎌낼 자질과 능력이 있을까?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신앙 시험을 곡해하지 않고 바르게 해석하며 이 위험하고 힘든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신앙은 재미가 아니다. 교리가 곧 신앙이다. 이제라도 제 길을 찾아가자.
/최더함 박사(Th.D. 개혁신학포럼 총괄책임. 마스터스 세미너리 책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