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반전 영화를 좋아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영화가 아니라, 결말이 상식적 예상을 뛰어 넘는 영화를 말한다. 반전 영화가 흥행하다 보니, 무리하게 반전적 요소를 집어넣어 오히려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영화도 있었다.
반전 영화를 좋아하고, 일방적인 경기 보다는 역전이 있는 경기에 더욱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미 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우리 인생이 지루하고 특별한 돌파구가 없어 답답한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들은 불편하고, 한방에 역전하는 것에는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다.
그런 의미에서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독자를 당황케 한다. 왜냐하면, 반전 없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소설의 제목인 동시에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는 미주리 주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소처럼 일만 하는 아버지, 인생의 의미가 참고 견디는 것에 있는 것 같은 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묵묵히 일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던 어느 날, 농사짓는 새로운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스토너를 농과대학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한다. 부모에게나 스토너에게나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으나 그들은 희생을 감내하기로 한다.
그곳에서 스토너는 농업과 동떨어진 영문학 강의에서 셰익스피어의 일흔 세번째 소네트를 듣고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두 페이지에 걸쳐서 나오는 그의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는 마치 성경에서 바울이 회심하는 장면을 떠올릴 정도로 인상깊다. 그리고 그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수가 된다.
이 정도로만 본다면 이 소설은 농사꾼의 자식에서 영문학의 대가가 된 입지전적인 한 인물의 성공 스토리이다.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소설의 초반 도입부에 불과하다. 작가는 그 이후에 스토너라는 한 인물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우정, 전쟁의 상처, 대학 사회의 알력, 사랑하는 딸의 인생이 망가져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소설을 읽는 내내 ‘아니 이게 다야? 이러면 안되잖아, 스토너 한 마디 해야지?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야? ’라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몰려 온다. 속이 뻥 뚫릴 것 같은 시원한 구석은 한군데도 없다. 가끔씩 나오는 그의 소심한 결단은 오히려 그의 인생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작가 존 윌리엄스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네 편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 만을 발표했다. 살아 생전에 위대한 작가로 인정 받지도 못했고 1965년에 출간한 소설 ‘스토너’ 역시 그의 생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도 못했다.그런데, 한때 절판 되기도 했던 이 소설이 뜬금없이 50년 후인 2013년에 영국의 최대 서점 체인인 ‘워터스톤’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전세계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왜, 평범한 아니 어쩌면 실패한 듯 보이는 스토너의 인생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의 힘겨운 인생의 무게를 오늘의 우리가 함께 지고 있는 것 같은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한방의 역전을 바라지만, 현실에서는 땅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 스토너를 통해 투영된다. 소신을 지키려는 결단은 칭송 받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힘든 인생을 더욱 꼬이게 하고, 이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킬 힘도, 능력도 없는 그의 모습은 곧 우리의 거울이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그나마 스토너가 누렸던 평범함 마저 부러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세상은 그때보다 훨씬 발전하고 안정되었지만 우리의 삶은 스토너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반전이 없어서 오히려 여운이 길게 남는 책이다. 스토너는 비현실적인 성공담의 환상으로 독자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인내의 삶으로 우리를 안아준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스토너는 이 시대에 우리와 ‘함께 맞는 비’와 같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