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산 증인' 박형규 목사가 18일 오후 5시 30분경 94세로 자택에서 했다.
1923년생인 박형규 목사는 지난 1960년 4·19 혁명 당시부터 독재정권에 저항한 후 1960-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박 목사는 1959년 서울 공덕교회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 한국기독학생회 총무(1967), 기독교방송 상무이사(1970), 기장 총회장(1981) 등을 역임했다. 민청학련 사건(1974), 기장 청년회 전주교육대회 시위사건(1978) 등으로 6차례 구속됐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 1973년 4월 소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으로 투옥된다. 당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플래카드와 전단지를 배포하려다 실패한 뒤 '내란예비음모죄'로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5년 후인 1978년 2월에는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새 민주헌법 필요성을 주장하는 '3·1 민주선언'을 발표하다 기소돼 또 다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 정권에서도 그의 민주화 운동은 계속됐고, 6년간 '노상 예배'를 드리며 저항했다. 박 목사의 명예는 지난 2014년 법원의 '긴급조치 9호 위반' 재심 결과 무죄 선고로 되찾아졌다.
박 목사는 장공 김재준의 제자로서 기념사업회 고문을 지냈고,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왔다. 그는 지난 2009년 장공 기념강연회에서 "나는 스스로 장공이 억지로 만든, 많이 모자란 제자임을 자랑으로 또 행복으로 여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저서로는 <해방의 길목에서>, <해방을 향한 순례>, <파수꾼의 함성>, <행동하는 신학 실천하는 신앙인>,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등이 있다. 박 목사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01호실에 마련됐으며, 5일장을 치른 후 오는 22일 발인예배가 드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