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애드립
로마법이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 애드리비툼(ad libitum). 흔히 줄여서 애드립(ad lib)이라고 한다. 자의적으로 또는 마음대로라는 법언이다. 상관 이레니우스 변호사가 얼마 전에 골로새법원으로부터 큰 승소를 얻어냈는데, 만민법 하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소급적용 금지의 원칙을 잘 주장한 덕이었다. 기득권은 사후입법에 의해서 자의적으로(ad libitum) 소급하여 박탈될 수 없다는 원칙. 겉으론 정의실현을 외치지만 현실에서 법학은 대개 가진 자의 도구이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역사의 발전은 기존 체제를 지키는 법학이 아니라 종종 그 너머를 이야기 하는 철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에 대한 대원칙을 지키고자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로마의 찬란한 오늘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로원은 그후로 100년이 되도록 왕정체제를 비판하지만 공화제에 머물렀다면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그저 그런 국가에 그쳤을 것이다.
나는 예수의 혁명적인 가르침에서도 루비콘을 건너는 희열같은 것을 느낀다. 여호와에게 직접 받은 율법은 유대인에게 말 그대로 신성불가침의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율법의 원래 정신은 퇴색되고 무의미한 관행이 되어 유대인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예수가 안식일의 율법을 일부러 어긴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애드립(ad lib)이 아니었다면 여호와의 정신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을 수 없었다. 신이 죽도록 피조물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은 신을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이 기이한 믿음은, 오로지 예수의 파격으로 인해 오늘날 제국변방 너머까지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내게 곤혹스러운 게 하나 있다. 많은 교회들에서 최근 들어 이단의 문제가 심각하다. 예수가 신이면서 어떻게 동시에 사람일 수가 있느냐든지.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분법으로만 신앙을 해석한다든지. 사도 바울도 서신에서 경계한 게 여러 번이다. 율법에서의 해방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 각 도시의 가정교회가 유대경전과 예수의 기록을 누구나 자유로이 읽게 하다 보니 더욱 그러한듯 하다. 급기야 입장에 따라 성도들끼리 다투기 시작했다. 얼마전 아시아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이 에베소에 모였다. 이런 말이 나왔다.
앞으로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ad lib)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직자 계층을 따로 만들고 평신도는 오로지 가르침을 듣게만 하자고. 문득 예수를 심문하던 유대 산헤드린 공회와 골로새법정이 떠오른다.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 신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33. 든자리 난자리
꼭 교회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떤 사람은 그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모임을 빛이 나게 한다. 더구나 그가 신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을 실천하는 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때로 기독교인은, 성경 말씀 그 자체보다도, 그 말씀을 현실에서도 타협없이 이루어내는 사람을 보며 자신의 신앙을 다짐하곤 한다. 골로새로 파견된 2년 우리 교회를 다니다가 오늘 로마로 돌아간 순주게를 보내는 마음이 그러하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는 동양속담이 있던가.
그를 보내는 큰 허전함 뒤로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 찾아 든다. 나는 왜 이리 지쳐 있을까. 예수의 가르침을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유한한 이 삶을 뛰어넘게 할 영광이라 말하지만, 나는 속으로 깊이 회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담스런 자리를 어떻게 하면 티나지 않게 비울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참이다. 니느웨를 피하고자 고래뱃속을 선택한 요나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니. 예수 믿는 게 심지어 슬프게 느껴진다니. 나는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