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철학자 세네카의 제자였던 마르쿠스가 스승의 죽음 뒤에 골로새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아내의 전도에 못이겨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내게 꽤나 흥미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세네카가 이끌던 스토아학파가 어떤 이들이던가. 세상이 불로부터 시작하여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유물론이 그들의 바탕이니 죽음 이후를 설명하지 못하지만, 윤리로는 금욕과 마음의 평정상태, 그리고 인류애를 인간이 추구할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한 스토아철학은 로마에 이르러 만개하면서 우리 사상의 근간이 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철학이 좋아 따르는 이는 어디서나 엘리트 위주의 유별난 소수일 뿐이다.
마르쿠스는 교회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사도바울의 편지 필사본들을 가져다 읽더니 얼마전부터는 70인역 이스라엘 율법과 역사서를 빌려 심취해 있던 중이다.
읽어본 소감이 어떠냐는 내 질문에 어제는 이런 소리를 한다. 바울은 꼭 세네카를 보는 것 같다고. 바울이 편지들에서 겉으로는 은혜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결국 그 뒤에는 이스라엘의 여호와보다 금욕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면서. 가말리엘 문하생들이 공부한 것은 그들의 율법서뿐 아니라 우리시대의 철학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확신이 차있다. 그리고 여호와가 수천년전부터 이스라엘에 요구하고 있는 게 지금 로마의 스토아철학이 강조하는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다.
곰곰히 생각하니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도 여호와가 이스라엘에 요구한 것은 결국 두 가지로 요약된다. 거룩함과 사랑. 토라같은 율법서는 물론 이스라엘을 꾸짓느라 바쁜 예언서에서 신은 흠없는 제사와 제물에 대해 어찌나 반복하여 강조를 하던지 조물주의 거룩함에 대한 집착이 의아스럽던게 한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앞의 네 조항은 신에 대한 사랑을, 뒤의 여섯 조항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에 다름없다. 당신의 아들 예수도 성경의 가르침을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정리하지 않았던가.
바울은 은혜에 의한 구원 이후의 삶이 거룩함에 이르는 열심으로 가득차야 함을 편지마다 강조했는데, 유대사상은 물론이지만 스토아의 금욕주의의 영향도 있겠다 싶다. 바울은 너무 모범생이다. 하여간 여호와가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은 로마의 다른 신과 달리 참으로 도덕적이다. 선택받은 자녀에게 요구하는 것이 경건과 사랑의 실천이라니. 세네카가 무덤에서 깨어 일어나 반가워할 일이다. (저자주 - 실제로 위경으로 평가되는 바울과 세네카 사이의 서간문도 남아 있다.)
마르쿠스가 회고한다.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를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코웃음 치더라며. 인간은 아담때로부터 늘 일탈을 꿈꾼다. 신과 인간의 밀고 당기기가 잔소리 많은 어머니와 말썽꾸러기 아들을 연상시킨다. 저 하늘을 창조한 신이 어머니와 같은 인내심으로 이 땅의 보잘것 없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보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이 세상 최고의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