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안록
우치무라 간조 | 포이에마 | 232쪽

중학교 1학년 때 참석한 교회 중고등부 여름수련회의 기본 주제가 함석헌의 '성서로 본 조선 역사'였다. 그때 하루 두 번씩, 아마도 한 시간 반 정도는 족히 채우고도 모자라 교회에서 나머지 강의를 했을 정도로 꽤나 긴 분량을, 당시 전도사님이 열정적으로 풀어 나갔다. 당시 나이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몰랐겠지만 나는 꽤나 진지하게 열심히 들었고, '한으로 풀어낸 조선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슴 깊이 새겨져 나름의 사고나 책 읽기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던 것 같다.

그때 강의에 등장한 성서조선과 김교신,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사상적 출발점이 되었을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서도 얼핏 기억난다. 감명 깊게 들었다는 것과 그것을 소화해 낸다는 것은 다른 것이기에 함석헌의 저작을 읽기에는 수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고, 내게는 우치무라 간조의 책이 더 빨리 다가왔다. 그것도 전혀 다른 길을 통해서.

우연히 접하게 된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과 다른 소설들, 그리고 그녀가 쓴 '길은 여기에'의 연작과 성경 관련 서적들을 보며 그의 신앙 행로를 좇아가 보게 되었다. 그러다 미우라 아야꼬의 책을 낸 출판사의 문고 시리즈에 같이 있는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우치무라 간조라는 일본식 표기 대신, 한자로만 內忖監三이라고 저자가 적혀 있는 <구안록>으로(당시 미우라 아야꼬도 三浦綾子라고 저자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었다).

우치무라 간조와 內忖監三를 연결 짓는 능력은 부끄럽지만 그 당시 내게 없었고, 당시 중학생 나이로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것도 함석헌을 통해 김교신의 감동적인 생애는 박혀 있었지만, 우치무라 간조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럼에도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은 내게는 상당히 인상적인 책으로 박혔다. 후에 읽게 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만큼이나 신앙의 중심을 건드렸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처럼 청소년 시기의 정서에 한 장의 생각을 더한 책으로 자리했다. 구원이란 말 대신 쓴 '구안'이란 표현도 더 독특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저자는 구원이란 피상적 의미일 수 있는 것을 넘어 진정한 평안을 찾아가는 일임을,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이 얻기를 바랐던 것 아닐까? 물론 구원이 피상적인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성경에 대한 문자적 접근이나 관념적 신앙에 대한 접근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착각 신앙'이나 구원은 받았다 하면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 속에 있을지 모른다.

주변을 돌아보자.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고 교회에서 중직자나 심지어는 목회자로 사역하며 봉사하는 이들 중에도, 또 구원의 확신을 물으면 구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이들 중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평안하냐?'고 물으면 주저하는 경우를 꽤나 본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 속에 구원이 주는 복을 깨닫지 못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그저 입으로의 시인에서 멈추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들이 받은 복음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거나 묵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 구원을 받았다면 평안은 필수적이기에, 구원을 통한 평안을 누리지 못함은 결국 무언가 내 신앙에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구원의 깊이로 들어가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1부에서 그는 직접 구도하는 자로서 걸었던 신앙의 갖가지 행로의 시행착오를 통해,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것들이 쓸모없고 또 잘못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저자의 그러한 행보는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걸었던 것만큼이나 흥미롭고 진지하며 필사적이다.

2부에서 저자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제 평안을 얻기 위한 과정과 방법을 보여 준다. 저자가 일종의 변증법적 접근을 하는 것이, 지금의 독자들에게 시대적 간극 때문에 약간은 원론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수 있다. 깊이 있는 사색이나 진지함보다는 감각적이고 가벼움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는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저자의 진지함과 몸부림이 아닐까 한다. 독자의 귀를 간질거리게 하는 많은 신앙서적 아닌 신앙서적들은 상처를 가리는 반창고를 붙여 줄지 모르지만, 정작 그 병을 치료하는 길로 이끌지는 못할 수 있다. 또 영접기도는 드려도 주님 앞에서까지 무거운 짐을 계속 지게 하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은 내게는 잊고 있었던 방황의 나날들에 썼던 일기장의 한쪽과 첫사랑을 보게 해 준다.

/문양호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 만들어가는 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