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 교회
제라드 C. 윌슨 | 생명의말씀사 | 304쪽
항상 내 나이보다 젊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오랫동안 나이를 잊고 살았다. 하지만 오십 줄이 넘어가면서 마음과 달리 몸이 삐그덕거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눈에서 오는 이상과 예전과는 다른 체력을 조금씩 실감하며, 많이 늦었지만 몸관리가 필요함을 느꼈다. 하루에 커피 십수 잔을 마셔도 거뜬하던 몸이 가끔씩 속쓰림을 느끼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책을 읽었던 눈도 조금만 어둡거나 차 안이 흔들리면 침침함이 찾아왔다. 건강관리를 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몸뿐일까? 교회도 마찬가지일 게다. 건물이 크다고, 사람이 많다고, 겉보기에 좋다고, 건강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는 아닐 수 있다. 당장은 문제 없이 잘 돌아가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무엇보다 세상 단체들과 달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하냐가 중요하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제라드 C. 윌슨이 쓴 <탕자 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다. 탕자 교회, 즉 돌아온 탕자 비유처럼 교회가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저자는 외형적 멋과 시스템, 방법론에 경도된 교회를 향해, 그 환상을 깨고 본질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한다. 교회에 인원이 많고 활기가 넘치면 성공한 것 같다. 실제로 그런 교회들은 예배가 뜨겁고 감동적인 듯싶다. 목사들의 설교도 예리하고 세련되고 인상적이다. 그러면 성공한 것이고 부흥한 것일까? 그러나 저자는 그것에 브레이크를 건다.
저자는 지금의 교회들을 '끌어모으는 교회'로 정의한다. 이 끌어모음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이고, 전도적 관점에서는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끌어모으는 것이 무엇이냐가 문제이다. 그것이 설혹 외형적으로 죄나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들을 끌어당겨 교회에서 무엇을 듣게 하느냐이다.
또 무엇보다 모인 이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모인 이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로 수평이동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는 그렇게 모인 이들이 끌어당겨지긴 했지만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끌어당겨짐은 의미 없는 짓일 수 있다.
물론 그런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단편적으로 이야기하거나 선택사항 중 하나쯤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복음을 바로 선포한 것이 아니다. 저자가 지적하듯 대형교회나 유명 목회자들이 아주 다른 메시지를 전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 조엘 오스틴도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문제는 부분적이고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단편만 강조한다. 긍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죄에 대한 인정이나 고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들의 문제는 영화의 예고편만 보고 영화를 다 보았다고 생각하며 나가는 관객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복음을 접해도 간혹 거듭나거나 변화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확률은 아주 작고 드물 뿐이다.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사가 어쩌다 설교 시간에 결신한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말할 때, 그렇게 일어난 이들로 인해 복음을 올바로 선포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그들조차 올바로 복음을 듣고 반응했는지도 의문이다.
이 끌어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무엇 때문에 그들이 교회로 나오게 되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단지 교회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라면-어떤 교회나 목사도 그렇게 말하진 않겠지만, 그것이 교회 성장과 건강함의 잣대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이미 그 교회는 실패한 것이다. 물론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고 수단화시키지 않으려는 시도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할 경우도 있다. 복음을 선포할 때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도 거북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추어 복음의 핵심 또는 일부를 빼는 것은 교회의 치명적인 패착이 될 수 있다.
끌어모으는 교회의 반대편은 저자가 지적하듯 전통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프로젝트와 찬양팀, 다양한 프로그램이 복음을 올곧게 증거하는 것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교회는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 특히 예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종종 끌어모은다는 미명하에 예배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맞추곤 한다. 여기서 예배의 왜곡이 일어나고 그 중심이 바뀌게 된다.
또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놓치기 쉽다. 쌀집에서 모든 식료품은 팔면서 정작 쌀을 팔지 않는다면, 그 쌀집은 최소한 쌀집 간판은 내리고 슈퍼마켓 간판을 다는 것이 옳다. 끌어모으는 교회도 그렇지 않을까?
저자는 윌로우크릭교회의 '발견'이라는 보고서를 자주 언급한다. 메가처치를 이루어냈고 남들이 보기에 부흥한 교회임에도, 윌로우크릭은 '발견' 보고서를 통해 자신들의 성취가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자인한다. 사람들은 많이 모였지만 변화되지 않는, 특히 홀로 서지 못하는, 신앙의 기형적이고 정체된 모습을 보였음을 그 보고서는 지적한다.
진정 복음적인 교회는 거듭남만이 아니라 성장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단지 교회에서 몇 가지 봉사를 하고 직분을 맡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자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네비게이토선교회의 도슨 트로트맨이 일련의 소책자들에서 지적했듯, 부부가 결혼한 지 오래됐음에도 아이가 없다면 건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신자가 오랜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전도한 열매가 없고 제자를 키우지 않는다면 그 신자는 영적으로 성장한 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성가대를 하거나 주일학교에서 교사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제라드 윌슨의 이 책은 침몰해가고 있는 거대한 유람선 같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문제를 알았다면, 그 답을 제대로 찾고 또 그것을 실천할 때 변화는 일어난다.
/문양호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 만들어가는 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