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년의 시간 동안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잘 듣는 법에 대해 배워본 적이 있는가? 책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우리가 생각한 것들을 글로 풀어내거나 말하는 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운 반면, 듣는 법에 대해선 대체로 관심도 교육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듣는 방법에 대해 반드시 훈련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잘 듣는다는 것은 사랑과 관심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며, 사랑과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실천적 사랑의 한 방법인 공감적 경청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경청의 경(傾)은 기울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몸을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여 듣는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청(聽)은 귀 이(耳) 자와 임금 왕(王)을 좌변에 쓰고 있다. ‘왕의 귀’로 들으라는 것이다. 한자적 의미는 커다란 귀로 들으라는 표현이다. 우리에게 왕은 바로 하나님이다. 우리가 배우자나 자녀, 동료나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귀로 들어야 하는 것이 듣기의 기본적인 첫 출발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변에는 열 십(十) 밑에 눈 목(目)자가 있다. 열 개의 눈을 갖고 들으라는 의미이다. 열 개씩이나 되는 눈을 동원해 가며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듣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왜 보는 것에 대해 말 하는 것일까? 경청에는 보는 것 역시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열 개의 눈으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말하는 상대의 표정이나 몸짓뿐 아니라 불안함, 혼란함, 당황스러움, 부끄러움 등으로 입 밖에 내어 놓지 못하는 그들의 진짜 마음이다. 우변 밑에는 한 일(一)과 마음 심(心)이 있다. 하나의 마음으로 들으라는 것이다. 그 하나의 마음은 다름 아닌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다. 결국 경청이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말의 내용을 파악함은 물론, 몸짓, 표정, 그리고 음성에서 섬세한 변화를 알아 차리고 깔려있는 메시지를 감지하며 나아가서는 그 사람이 말하지 못한 내용까지도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경청의 의미만 살펴보아도 벌써 골치가 아플지도 모르겠다. 잘 듣는 방법에 대해 배우기도 전에 이미 듣는 작업이 녹록치 않음을 느꼈다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내 볼 일을 보면서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그저 듣는 것이 경청이 아니라는 것과 잘 듣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경청을 배우는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경청이 어려울까? 첫째, 생리적인 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5배 빨리 듣는다. 즉, 1분에 120 단어를 말한다면 1분에 600단어를 들을 수 있다. 남는 시간에 무얼 하겠는가? 완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그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기가 그만큼 쉽기 때문에 경청하기가 어렵게 된다. 또한 사람의 성향에 따라 말하는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경청이 더욱 어렵다. DISC라는 자기 이해 검사를 통해보면 “D” 유형, 즉 주도형인 사람들은 서론이 길어지는 것을 참기 어려워하고 본론부터 바로 들어가야 한다. 결과와 유익에 대해 먼저 알리고 세부적인 것은 필요할 때 말해야 집중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변적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하면, 그들은 경청하기가 무척 어렵다. 반면 “C” 유형인 신중형의 사람들은 굉장히 정확하고 세부적이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방식뿐 아니라 대화의 패턴에서도 일이 일어났던 기승전결을 가능한 자세히 이야기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중형인 사람이 주도형의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집중해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 할 때가 많다. 따라서 잘 듣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이해와 상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둘째, 자기 안의 소리가 많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벌써 내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다. 내 안에 가득 찬 소리가 상대방의 말을 편견이나 판단 없이 듣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들으면서 원하는 결과를 어떻게 얻어낼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빨리 대화를 마칠 수 있는지, 아니면 더 유리한 방향으로 다시 끌고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려면 내 안의 소리를 음소거(mute)시켜야 한다. 물론 필요할 땐 권면도 해야 하고, 직면도 시켜야 한다. 그러나 성급한 권면과 직면의 단계에 나아가기에 앞서 우리는 일단 내 안의 소리를 죽이고 하나님의 귀와 열 개의 눈을 가지고 잠잠히 들어야 한다. 나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을 통해 존중 받는 것을 느끼며, 이해 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이야기 해도 늦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때가 상대의 진짜 마음을 들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이다.
셋째,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면서도 자꾸 말을 막는 등, 우리에겐, 듣는 자신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무의식적 동기가 작용하는 경우가 꽤나 존재한다. 나의 가치에 대한 위협, 권위에 대한 위협, 편리에 대한 위협, 안전함에 대한 위협들이 느껴질 때 우리는 상대의 입을 막아 듣는 입장에서 말하는 입장으로 성급히 역할을 바꾼다. 고상하게 역할을 바꿀 수 있는 도구로 때론 권면과 훈계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겠다고 ‘경청’이라는 것을 하는 순간 조차도 우리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뿌리깊이 ‘자기 중심적인 존재’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고 정직한 시인을 통해 노력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해야 한다.
위에 열거한 이유 외에도 여러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상대의 말은 듣되 그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후천적 난청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청을 잘 하기 위한 방법과 기술들이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왕의 귀를 갖기 위해 사랑의 보청기를 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말하는 사람에게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그 사람을 바로 우리 자신의 속으로 기꺼이 맞아들이는 영적 환대인 경청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청하는 행위의 아름다움은 말을 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 의하여 받아들여졌음을 느끼는 것이며, 감정의 표현이 용납되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며, 나를 알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너를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친밀하고 영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친밀하고 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다면, 이를 가로막는 나의 걸림돌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적극적 경청을 실천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