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배신의 입맞춤
토스카 리 | 홍성사 | 456쪽
소설로 형상화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 있다. 일부라도 성격과 얽힌 사건, 그 전개 과정과 결말 등에서 익히 알려진 인물이 거기에 해당한다.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인데, 예를 들면 결말이 드러나 있어 플롯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같은 이유에서 입체감 넘치는 줄거리를 갖추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 또한 고민스럽다. 같은 인물이 예로 든 사정을 모두 지녔거나 더 나아가 아주 평면적이라면, 어떤 이유로든 그런 인물을 형상화하려는 작가에게는 고문과 같은 고통이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위의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 소설로 각색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하다.
그와 같이 말이 되지 않는 작업에 뛰어든 작가가 있다면, 둘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물정을 모르거나 너무 영악하거나. 이렇듯 얼토당토 않은 좌판에 이름을 내건 작가가 있다. 이름마저 생경한 '토스카 리'가 그 주인공이다.
여기까지의 사정은 그래도 작가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주인공으로 다룬 인물이 누구인지 알면 태도 변화가 불가피하리라 기대해도 좋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인공을 유추할 만한 단서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스승은 그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룹 내에 회계 전문가가 있었음에도, 그가 전체의 회계를 도맡았다. 정리하면 그는 스승의 총애를 받았으며, 구성원들 모두에게 신임이 두터웠다.
그가 돌연 스승을 팔았다. 스승은 그 때문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스승을 판 돈으로 거리낌 없이 땅을 흥정했고, 바라던 걸 얻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자살했다. 이쯤에서 얼핏 떠오르는 인물, 바로 '유다', 맞다.
"어릴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헤롯이 죽지 않았더라면, 요단 강변에 있던 비쩍 마른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더라면."
유다는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익히 배신의 아이콘, 저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그런 그가 주인공의 자격을 갖추려면 주변 인물이라도 주변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배경이 대중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어필하거나, 스승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과정에서 피치 못할 어떤 사정이 개입해서 독자들이 눈물샘을 자극받지 않을 수 없거나, 이것저것이 아니라도 스승과 제자 간 밀약이 드러나 유다를 옹호할 일말의 구석이라도 있거나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특히 마지막 예의 경우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십자가에 달려야 하지만 그럴 계기를 좀처럼 찾지 못한 예수와, 그런 스승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친구 유다가 밀담 끝에 '유다의 밀고에 이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시나리오를 만들었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또 다른 현실은, 유다 편에 선 진술 같아 보여도 한 꺼풀 벗겨 보면 그만큼 유다를 옹호하는 입장이 빈약함을 드러낸다.
이런 마당에 유다가 전면에 등장하는 모양새고 보면, 누구라도 이 작품을 대하는 첫인상이 미묘하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토스카 리는 작품의 중심을 해방의 날을 고대하며 고투하는 로마 복속의 이스라엘이라는 시대 상황에 두고, 그 안에서 폭압 정권에 맞서 싸우며 죽음의 행렬조차 마다하지 않은 인물들의 뜨거운 일상 한복판에 '유대인의 반란'을 가져다 놓았다.
일상의 복판은 매 순간 요동치며, 가파르게 떨어지고 맹렬히 흐르는 특성이 있다. 긴장이 뱃멀미처럼 계속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특히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는 고통스러운 사건과 일상이 결부되면 그 추이를 예측하기가 무척 어렵게 되는데, 그건 마른 땅 위로 자욱하게 퍼져가는 먼지가 바지춤에 허옇게 내려앉은 줄 모르는 이치와 같다. 잠시 뒤 온몸을 에워싸는 먼지의 양상이나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의 형상을 묘파한 뒤란으로 가없이 쏟아지는 거친 일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서른여덟 번째 부림절이 끝난 직후, 그 평화는 산산조각이 났다."
「데몬: 악마의 회고록」, 「하와」 등의 전작을 통해 인물의 성격과 시대 상황을 공교히 직조하여 형태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그 위에 현실이라는 옷을 입힘으로써, 등장인물들을 파편화된 개인에서 보편적 인간의 양상으로 끌어올린 바 있는 토스카 리는, 이 작품에서 인간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죄성의 보편성에 보다 결 굵게 천착해 들어간 인상이다.
유다의 죄를 돌이킬 수 없는 범죄행위로 단죄하는 데 있어서는 전통적 시각과 다를 바 없지만, 유다의 범죄에서 보편적 인간의 동일한 범죄 가능성을 예리하게 묘파한 점이 두드러진다. 스승이자 인류 전체의 구세주인 예수를 판 행위는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유다에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틈을 주면 얼마든지 같은 범죄에 노출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표식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그 또한 무망한 일이다.
유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었다. 강하고 자랑스러운 그 이름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때, 이스라엘 역시 쓰러졌음을 암시한다. 같은 맥락에서 유다의 범죄는 개인을 넘어 필연코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를 상징한다. 실제 예수를 강도 높게 배척한 이들은 예수가 사랑한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들 역시 성난 얼굴로 창끝 같은 저주의 말을 뱉으며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요구했다.
십자가 처형을 청원하는, 광기로 붉게 물든 광장을 상상해 보라! 그 광장은 전날 환영의 꽃잎들이 흩날리고 묵직한 나팔 소리가 뭇별처럼 쏟아져 내린 곳이었다. 그러고도 그들은 죄를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에게 돌렸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물고기를 방치한 연못은 썩기 마련이다. 물고기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는 다양할지 몰라도, 그 이유를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한 장기적으로는 누구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게 정한 이치다. 유다라는 창을 통해 나를 비춰보는 노력의 일단은 당장 불편을 유발할 수 있다. 차라리 거리를 두는 게 여러 모로 나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의 무수한 흔적 속에 유다로 난 창이 지워질까? 배신의 크기가 다르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기독 소설이 지닌 인과관계의 평면성을 극복하고, 빼어난 긴장감과 정교한 구성으로 흡인력을 한층 높인 작가 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일반 소설 못지않은 문학적 성취로 기독 소설의 평가 층위를 여러 단계 위로 끌어올린 작가의 노고는 거듭 상찬받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유다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봄으로써 내재된 안일한 사고를 흔들어 깨우고 평온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데서, 「유다: 배신의 입맞춤」은 불편한 자극의 백미를 오늘도 이어간다.
/김정완
크리스찬북뉴스(www.cbooknews.com) 편집위원, 네이버 파워블로거, 평신도 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