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문화 사회에서 선교와 목회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외국인과 이주민 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실 때부터 모든 민족을 창조하셨고 다문화와 다민족들을 향한 목회사역을 위해 준비하셨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류의 역사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며 이뤄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우리는 구약성경 첫 번째 책인 창세기로부터 마지막 책인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인류가 다양한 문화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던 신앙의 역사였다는 사실에서 발견하게 된다.
구약성경에서는 자주 이방인들의 장래에 대해 논의되었다. 성경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에서 우리는 다문화목회의 대상인 이방인 혹은 이주민이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류의 시작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 후에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땅을 향해 문명과 복음의 전달자가 되어 온 땅에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외국인 이주민과 내국인을 가르치는 단어로 '게르'(Ger, 나그네)와 '자르'(Zar, 내국인), '토샤브(Toshab)'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들은 각기 외국인 이주민과 내국인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우리가 구약의 성경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이방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의 영역이 아니고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대상이라고 알게 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성경을 충분히 연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섬김과 사랑에 있어서 이방인과 외국인의 장래도 중요한 관심사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다. 특히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이러한 대표적인 말씀을 찾게 되는데 “너는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22:21-23>라고 명령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이 없고 연약한 자, 소외되고 억울한 자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할 대상이 객과 고아와 과부, 이방 나그네, 타국인,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출22:21, 레24:22, 신14:27, 신26:16, 시146:9, 시146:9, 사1:17, 렘7:6, 렘22:3) 또 레위기 19장 33-34절에서는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이방인들과 외국인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미국에서 지냈던 이방인의 생활을 생각하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낯선 땅 미국이라고 하는 타국으로 불러 아픔과 서러움을 느끼게 하셨는가를 이해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 우리는 타국에서 문화와 언어 그리고 갖가지 어려움을 견디며 오늘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과거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이방인의 아픔과 설움을 먼저 경험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금 우리 주위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방인들을 돌아보며 섬기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서 약자된 자, 학대 받는 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 바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들을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경말씀처럼 섬기며 사랑하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작은 실천이 이 땅 미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과 이방인의 마음을 어루만져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순간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