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 ‘알라’가 뜨고 있다. <알라-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몇 해 전, 미국에서 출간되어 아직까지도 논쟁이 계속되는 예일대 신학대학원의 미로슬라브 볼프의 책이 한국의 유명 기독교 출판사에서 최근 번역 출간된 데서 비롯된다. 또 최근 기독교 명문대학인 휘튼대학의 한 여자 교수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교의 알라는 동일 존재라 주장하여 학교 당국으로부터 징계 당한 일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아랍어 성경에는 하나님(God)이 알라로 번역되어 있다. 실로, ‘알라’라는 용어사용과 관련하여 교계가 떠들썩하다. 이런 차제에 본 필자는 볼프의 주장에서 여러 논리적 문제점을 발견하였기에 이를 밝혀 교계의 바른 판단을 위한 자료로 제시해 본다.
첫째, 언어기호론적 측면의 문제점이다. 모든 언어는 실재하는 것을 반영하거나 모사(模寫)하는 것이란 이론은 이미 19세기 말,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소쉬르에 의해 깨어졌다. 언어는 실재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그 언어 사용 집단의 개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집단의 개념(기의- signified)이 다르면 아무리 동일한 단어, 유사한 표현(기표-signifier)이라도 그것은 동일한 기호가 아니다. 언어는 그 어원적 유래가 어찌 되었든 현재 그 용어를 사용하는 공시 집단이 어떤 개념을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기호가 되고 그래서 아무리 보통명사로 시작했더라도 이미 고유의 의미를 담은 고유명사의 반열에 오르면 다른 기호가 된다. 실제로, 기독교 집단 속에서 형성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의미는 이슬람교 집단 속에서 형성된 알라의 호칭이 담고 있는 의미와는 너무도 다르다. 볼프는 성경과 꾸란의 내용을 대비시켜 동일한 속성과 유사한 개념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는 그것만이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개념을 빼고는 성립될 수 없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 존재가 행한 사역과 구분되지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시며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실존하신 하나님이며 인간의 죄를 대신해 구속적 사역을 이루신 분으로 성경은 기록한다. 성경을 특별 계시로서 믿는 기독교 집단 안에서는 하나님 개념 속에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구속적 사역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적 개념 속에 결코 포함시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의 의미가 알라 개념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교의 알라는 호환될 수 없는 다른 기호이다.
볼프는 오래 전부터 아랍어를 사용하는 콥트 교회가 ‘알라’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으며, 이 ‘알라’라는 호칭은 보통명사로서 신(神)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콥트의 알라와 이슬람의 알라는 비록 기표는 같을지언정 기의가 다름으로 다른 기호이다. 콥트 교회가 신의 의미로 보통 명사 ‘알라’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본의 ‘가미’와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기독교의 가미(神)와 다른 종교의 가미(神)를 수식어를 붙여 구별하고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믿는 ‘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아직 고유명사가 없던 시기에 수식적 관형어를 사용해 다른 종교의 ‘신’과 구별하는 장면과 같다. 영어권에서 God는 god와 대소문자 구분만 빼면 같은 철자, 같은 발음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개념을 부여하는 다른 단어이다.
둘째, 존재론적 측면의 문제점이다. 볼프에 따르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교의 알라는 추종집단의 인식론에 차이가 있을 뿐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론을 거론하려면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영존하시는 분으로 3차원적 공간과 시간의 개념으로 대상화 될 만한 제한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3차원의 한 사물(예를 들어, 탁자 위의 사과)을 향해 다른 방향에서 두 사람이 손가락으로 지시할 때, 두 사람은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고 있다는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3차원의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제한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채,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시작부터 근본을 놓친 것이다.
볼프는 이번 저작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성경과 꾸란 속에 나타난 하나님과 알라의 속성 간의 공통점을 찾아 밝히는 데 주력한다. 이것이 그의 동일 존재론 주장의 근간을 이룬다. 물론 그리스도는 제외된다. 이런 논리는 ‘부분을 보고 전체를 추론하는 방식’으로 항상 무리가 따른다. 문제는, 볼프가 주장한 동일 존재론의 논리를 수용하게 되면, 고대 근동에서 보통명사 ‘엘’을 붙였던 우가릿 지역의 셈족의 ‘신’이나 이집트의 태양신 ‘라’가 하나님과 동일 존재라고 주장해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고대 근동에서 ‘엘’은 신적 개념에 해당되는 표현이며 고대 이집트 기록에 보면 ‘라’도 태양신으로서 창조자, 자존자 등의 의미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논리를 확대하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하여 온 천지신명(天地神明)은 기독교 하나님과 동일 존재며 성경을 이런 표현으로 모두 바꿔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다소 공통된 의미가 있다고 해서 아무 용어나 무분별하게 가져다 혼용하면 원래의 본질적 개념이 변질되고 고유의 정체성이 상실될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한다. 이런 위험성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른 이름으로 호칭하는 것이 매우 유효 적절하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처음 전파된 시기부터 ‘하나님’이란 새 칭호가 사용된 것은 기독교적 신(神) 개념을 새롭게 담아내어 전파하는 데 매우 획기적이고 유용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통 명사로서의 신(神) 개념이 한 집단에서 고유의 의미(공시적 기의)를 추가하여 지속적으로 사용되다 보면 고유명사화(공시적 기호화)된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처음부터 새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고 적절하다. 구약에도 모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를 물을 때,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새롭게 구별된 이름을 일러주시는 장면이 나온다(출3:14).
정체성 상실의 위험성과 아울러 추가되는 문제점은 또 있다. 신천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 많은 기독교 이단들의 하나님이나 성경의 하나님은 동일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존재를 믿음의 대상으로 신봉하는 것이고 따라서 같은 신앙의 대상 아래서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사소한 차이를 문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까지 나아갈 여지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되어 ‘평화와 공존’의 대의명분 아래에서 하나의 지구촌 공동체 의식을 위해 모든 종교가 협조와 양보의 자세로 서로서로 용납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물론, 그 결과는 종교다원주의, 보편구원, 세계통합종교 등의 결론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셋째, 계시론적 측면의 문제점이다. 즉, 계시론의 맥락에서 성경과 꾸란의 유래에 관한 문제를 짚어 봐야 한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기원후 4세기에 정경화가 최종적으로 마무리 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기독교의 보수적인 믿음은 성경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하신 특별 계시라고 확신한다. 한편, 꾸란은 7세기경 이슬람이 조직력을 갖추던 시기에, 성경과 여타 종교의 경전을 참고하여 당시의 이슬람 지도자들의 의도에 맞춰 23년 만에 편찬된 경전이다. 이브라함(아브라함)의 기사를 기록한 내용을 보면 이스마엘이 적자이고 이삭이 서자로 나온다. 제단에 바쳐진 것도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편집 대목이 꾸란에는 흔히 나타난다. 이것은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위경에 속한다. 만일 꾸란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한다면 기독교의 다른 위경들도 정당한 계시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볼프가 예일대의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도 성경의 권위를 높이려는 입장에 서 있다고는 하지만, 이번 저작에서만큼은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이 지닌 유일한 권위를 전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성경과 꾸란을 동일 수준의 경전 차원에서 대비시킴으로써 그가 의도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성경 권위의 유일성을 잠식하고 있다. 그가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로 그의 주요 관심사는 ‘공존의 정치신학적 논리’이다. 우려되는 것은, 교계에 잘 알려진 학자가 이처럼 혼란스런 혼합주의 시대에 ‘공존의 미명’ 아래, 기독교의 본질을 흐려놓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여기에 지명도 있는 지식인들과 언론출판 관계자들이 합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혼미한 상태로 치닫게 할 위험 인자를 유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런 상황 전개가 그 동안 무분별하게 혼용되어 왔던 용어의 개념 정립을 위한 논의의 장이 활발히 펼쳐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이자 성경의 중심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본주의적인 논리와 상식으로써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고 하는 ‘절대역설의 존재’를 우리가 부여잡는 한, 우리 역시 세상에서 용납되기 어려운 편협한 존재로 치부됨을 기꺼이 감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