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13일 열린 한국실천신학회 제51회 정기학술대회에서는 '실천신학' 특성에 따라 '설교와 공감', '세월호 유족들의 상담치료' 등 다양한 발제가 이어졌다.
이현웅 박사(한일장신대)는 '공감과 설교의 실천적 만남: 설교학적 측면에서의 공감에 대한 이해(설교신학)'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보통 하나님 말씀의 '일방적 선포'로 인식되는 설교행위에 있어 '공감'의 중요성을 제시한 것.
이 박사는 "오늘날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학문적으로 훈련되고 준비된 사람들이고, 설교학적으로도 상당한 수준들을 갖췄다. 청중 역시 교육 수준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높아져 있다"며 "그런데도 왜 설교자들은 설교를 하면 할수록 힘들어하고, 청중은 설교에 더욱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소통)은 인간 상호 간의 공감(共感, empathy)이 형성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일어나므로, 우리는 공감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며 "설교도 형식과 방법에 있어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효과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기재(器財)로서의 공감'에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사도 바울은 '사랑 없는 언어'는 그것이 아무리 신비한 방언과 천사의 말 같아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전 13:1)고 했다"며 "사랑의 언어만이 사람의 가슴에 와 닿을 수 있고 사람을 움직이고 비로소 사람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이야말로 상호 간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감 아닐까"라고 전했다.
그는 "진정한 설교를 위해서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메시지를 통한 공감이 일어나야 한다"며 "그럴 때 설교자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씀은 비로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중에게 바로 전달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공감'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 생각,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가 느끼는 것을 같이 느끼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함께 이해하며 그가 처한 상황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느끼는 것을 내가 느끼고, 상대의 감정과 경험과 상황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인식하며, 그 사람의 처지에서 같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설교학적으로 적용하여 '상대'를 '청중'으로, '나'를 '설교자'로 대체하면, '공감은 청중이 느끼는 것을 설교자가 느끼는 것이고, 설교자가 청중의 감정과 경험과 상황을 청중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인식하며, 청중의 처지에서 같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이현웅 박사는 "설교는 설교자의 입을 통해 나가지만 청중의 귀를 통해 들린다는 점에서, 설교는 언제나 설교자와 청중이 공감하는 것이어야 한다"며 "그러나 오늘 우리 설교 현장은 과연 설교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청중과 공감되고, 설교자들이 전한 메시지가 청중의 가슴에 와 닿아 그들을 뜨거워지게 만들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3천 명을 회개시킨 베드로의 설교(2:14-41)와 순교를 초래한 스데반의 설교(6:7-7:60)를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베드로는 그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2:14)', '이스라엘 사람들아(22)', '형제들아(29)'라고 부르고 있는 데 비해,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7:51)',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52)',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52)'라 말하고 있다"며 "두 그룹의 청중은 설교를 듣고 모두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한 그룹은 회개했고 다른 그룹은 오히려 돌을 들어 설교자를 쳐 죽였다"고 비교했다.
이 박사는 "스데반은 청중의 머리(head)에 설교했다면, 베드로는 가슴(heart)에 설교했다고 할 수 있다"며 "스데반은 청중의 지식과 이해를 목적으로 했다면, 베드로는 감동과 공감을 목적으로 했다. 스데반은 듣는 상대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베드로는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에 감동(感動)과 감화(感化)를 줬다. 이 두 설교자는 우리에게 '변화는 지식이 아니라 공감에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이현웅 박사는 "이처럼 설교의 생명력은 공감에 있다"며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공감하고,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청중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 그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된다. 그때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죄와 죽음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며, 사람들을 회개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감되는 설교를 위해 설교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그날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을 철저하게 묵상·연구·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청중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는 "이것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설교는 제1청중이신 하나님, 그리고 제2청중인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아픔 표현할 자리 마련해야
이후 권명수 박사(한신대)는 '사회적 애도 가능성 연구: 세월호 사건을 중심으로(상담치료)' 발표를 통해 '공동체적 의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목회적 돌봄과 상담을 행하는 우리들은,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참혹한 일을 경험한 이들에게 어떻게 돌봄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며 "무엇보다 돌봄 목회자들은 유족들을 '지탱(sustaining)'하도록 하는 데 자신이 가진 자원과 시간을 경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돌봄 목회의 '지탱'이란 회복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도록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는 돌봄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후 권 박사는 "아픔을 겪는 유가족들과, 이들과 연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애도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야 한다"며 "이를 통해 이들의 아픔을 외부로 표현케 하고, 이를 통해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도 함께 그러한 애통의 자리에 들어가 아파하면서, 자식을 잃은 부모와 유가족의 마음을 건드려 줄 수 있게 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이는 누군가를 정죄하고 비판하기보다 세월호 사건의 아픔을 드러내고 노래하고 표현하는 자리, 곧 의례(ritual)의 형태를 띤 것이어야 한다"며 "애도를 위해 의례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과 참여자들이 충분히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기간과 분위기를 적절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는 한 번에 그치는 문상과 차원이 다르다"며 "애도의례는 장시간에 걸친 반복된 의례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드러냄을 허용하고 권장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의례를 통해 참가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동체성을 회복시키면서, 유족들에게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며 다함께 애도하는 무리라는 심리적 일치감을 주어 애도를 상당히 진전시킨다"며 "이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는 이유는, 유족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잊히고 묻히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