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The Apostle's Life, Letters, and Thought
E. P. Sanders | Fortress Press | 898쪽(paperback) | 39.00달러
2부 바울의 편지들
샌더스는 '바울의 편지'의 저자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증하고(어구 일치 등) 분류하고 넘어갈 뿐, 세세하게 학술적으로 이 모든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비록 바울의 편지라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만(에베소서, 골로새서 등), 그는 기독교가 발전함에 따라 그것들도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듯 저자에 대한 느슨한 접근과는 달리, 샌더스는 바울 편지의 연대는 바울 사상의 발전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이므로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샌더스는 자신의 바울 편지 읽기가 기독교 운동과 관련한 바울의 회심과 그의 선교에 대한 역사적 추적일 뿐, 설교자에게 유용한 도덕적 가르침을 끄집어내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게다가 바울은 오늘날 학자들처럼 글을 쓴 것이 아니며, 또한 책들, 특히 헬라어 구약성경 없이 여행하며 편지를 썼다. 글을 쓰기에 바울의 환경은 열악했으며, 그는 바쁜 삶을 살았다. 샌더스의 충고를 염두에 두고, 이제 그가 말하는 '바울의 편지 읽기'를 시작하자.
1. 데살로니가전서
샌더스에 의하면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초기 사상을 알려 주는, 가장 이른 연대의 편지다. 샌더스는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 교인 사이에 공유되는 선지식을(나름의 등급별로) 다룬다. 단계적 논증이라 요약하기 곤란하지만, 핵심은 이방인들에게 그들 종교의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그분의 아들로 믿으며, 그것을 통해 곧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예수의 재림)를 피해 구원받으라고 바울은 가르쳤으며,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방인들로, 그 바울의 복음을 믿고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그 중에 죽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바울은 이 사실을 디모데를 통해 들었다. 우리는 바로 이 전제 위에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이방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고대 세계에서 유일신관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러한 개종은 지역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라는 사회문화적 관념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 유대교는 로마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고 데살로니가 지역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께로 개종했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아니었다. 그들의 개종은 유대교와 그리스-로마 세계, 이 두 공동체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위험했다.
게다가 그들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정말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예수와 바울, 초대교회는 종말론적이었다. 그러나 데살로나가 교인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자, 의심과 불안이 엄습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살아있기를 원했지만, 지인들의 죽음으로 인해 걱정에 휩싸인 것이다.
샌더스에 의하면, 바울은 처음부터 그들 모두가 부활할 것이라 가르치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가 이미 죽었다가 부활했으며,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들은 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고 가르쳤기에, (아마도 순교가 아닌) 죽음이 그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라고 샌더스는 주장한다. 종말론이 얼마나 지배적이었는지, 일조차 하지 않았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를 추측할 수 있다(4장 11절, 5장 14절을 참조하라).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바울은 성도의 부활이라는 신학을 정리해서 제공한다. 그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의 핵심 주제이다.
2. 고린도서신들
샌더스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린도전후서라는 순서에서 벗어나 편지의 순서를 재구성한다. 따라서 바울이 겪은 사건도 샌더스는 재구성한다. 여기서는 샌더스가 재구성한 고린도서신의 순서만 소개한다.
①현재 소실된 첫 번째 고린도서신(고린도전서 6장 14절-7장 2절이 그 일부일 수 있다) ②고린도전서 ③고린도후서 10-13장(소위 눈물의 편지) ④고린도후서 1-9장
고린도서신의 주제는 방대하다(샌더스는 부록과 색인 등을 제외한 700쪽 중 200쪽 이상을 고린도서신 해설에 할애한다). 그만큼 고린도교회에는 문제가 많았다. 선택적으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다루어 보자.
무엇보다 고린도서신에서 다루는 성(性)의 문제는 현재 한국교회에서도 중요한 이슈이다. 샌더스는 그 중에서도 여성의 머리카락에 대한 바울의 주장은 정말 풀기 어려운 난제라고 말한다.
샌더스는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로, 바울이 나름대로 하나님의 창조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일종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샌더스는 고린도전서 11장 10절 '천사들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았다는 기사를 가져 온다. 즉, 바울은 천사들이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그녀들을 여자로 식별하고 그녀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으리라 샌더스는 추측한 것이다. 이 외에도 샌더스는 바울의 여성에 대한 언급들을 다루는데, 어쨌든 그러한 바울의 가르침 모두 '자연스러움'을 기준으로 한, 당대의 문화에 의존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다른 난제는 여성의 침묵을 종용하는 바울의 가르침이다. 바울이 바로 몇 장 앞에서 머리를 가리고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하라'고 해 놓고, 뒤에 가서 침묵하라고 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물론 사람이 생각을 다르게 할 수도 있고 행동 역시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지만, 이처럼 상반되는 두 가지 가르침(기도하고 예언하라 vs 침묵하라)을 동시에 권면할 수는 없다. 샌더스는 이것이 조화될 수 없는 명백한 모순이며, 후자를 후대에 덧붙은 것으로 본다.
한편 매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그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매춘은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고대 유대교에서 불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유대교에서는 엄격한 기준이 생겼다. 왜냐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흩어진 지역에서 온갖 종류의 성적 일탈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엄격함은 이러한 그의 정체성에서 온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과 관련하여, 바울은 몇 가지 원리를 내세운다. 우선 바울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원리를 내세웠다. 그 이후 그는 다소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형론 논증을 한다. 이것은 1세기 유대교의 해석 방식이었는데, 쉽게 말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어떤 행위가 반복되면 그 결과도 반복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바울은 참여와 연합이라는 키워드로 성찬과 비교하는 가운데,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를 다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원리로 '인클루지오(Inclusio·양괄 대칭 구조)'시킨다. 바울에게 있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은 매우 거리끼는 것이지만, 관용을 둔 것이다! 샌더스는 전혀 예상치 못할 결론이라며, 자신은 그런 바울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의 관용 정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샌더스는 바울이 양심을 통한 타인에 대한 속박을 경고한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고린도서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부활'일 것이다. 샌더스는 앞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본래 바울이 염두에 뒀던 부활은 예수의 것이었지 성도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것은 성도를 위로하기 위해 나중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이 성도의 부활이 중심을 차지한다(샌더스의 순서에 의하면 고린도전서는 데살로니가에 바울이 편지를 보낸 뒤, 여러 곳을 여행한 후 작성된 것이다).
당대 고린도를 포함한 헬라권에는 영육이원론, 그리고 '육체(soma)가 곧 감옥(sema)'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고린도 교회에도 육체의 부활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자연스럽다. 비록 그들이 영원한 삶을 믿었을지라도, 육체의 부활은 거부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육체의 부활을 말한다(샌더스는 이 부활 개념이 페르시아의 종교(조로아스터교)에서 온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페르시아에 의해 통치되던 시절, 유대인들이 그 종교에서 부활 개념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즉, 몸의 부활 개념과 영혼 불멸 개념이 유대교 내에서, 그리고 후에는 기독교 내에서도 종합됐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주장처럼 영원한 삶과 '썩어가는 육체'는 양립할 수 없으므로,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몸'을 도입한다. 그 새로운 몸은 부활 이후 예수의 몸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영적인 몸' 개념은 다소 애매하다. 이것은 육체 없는 유령과 같은 것도 아니고, 그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뚱어리만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샌더스는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샌더스는 바울의 사상을 설명하면서, 중간중간 모르는 것들에 대해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샌더스는 바울이 부활에 대한 담론을 고린도후서 3-5장 해설에서 이어간다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겉사람의 변화'를 주장했지만, 고린도후서 3-5장에서는 '속사람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실현된 종말론'이라 할 수 있는, 현재에 일어나는 일이다.
육체는 쇠하나 영은 그렇지 않다는 바울의 주장은, 샌더스가 볼 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과도 같았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육체 없는 인간을 부인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적 사고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으며 고린도전서 15장과도 분명 다르다. 아마 부분적인 철학적 수용이 필요했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샌더스는 여기서 두 가지 가능성을 주장한다. 한 가지는 고린도 교인이 현재에서 영적 부요함을 더 누리고자 해서, 이에 응답한 것일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예수 재림(파루시아)'의 지연으로 바울의 부활 신학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어느 것이 정답이라 결론 내리진 않지만, 저 두 가지 이유가 혼합돼 있으리라 생각한다.
3.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정학적 문제에 직면한다. 샌더스도 '남부 갈라디아설'과 '북부 갈라디아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샌더스는 '북부 갈라디아설' 지지자이다(샌더스는 이 문제를 부록에서 따로 다룬다). 그리고 샌더스는 갈라디아서가 고린도서신 교환 이후 로마서를 쓰기 전 작성된 것이라는 라이트풋의 견해에 지지를 보낸다(이 외에도 라이트풋에 대한 샌더스의 지지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갈라디아서의 주요 안건 중 하나가 바로 '할례'이다. 이 할례가 언제 어디서 기원했는지 샌더스는 모른다고 고백한다. 할례는 이집트를 포함한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의미 있는 의식이었고, 특히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나타내는 표식이지만, 그리스-로마 문명 세계에서는 그러한 신체 손상을 야만적 행위로 여겼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기에, 그들은 할례 받은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환영했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냉담하게 반응했다.
그래서인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화가 난 어조로 갈라디아서를 쓴 것처럼 보인다(이것은 비단 샌더스만의 시각은 아닐 것이다). 할례의 문제는 이렇게 확장될 수 있다. '예수를 믿은 이방인이 유대교의 관습(할례, 절기, 음식 등)을 따라야만 하는가?'
샌더스에 의하면, 바울은 이방인들이 개종하길 원했으나 그들이 유대인이 되길 원치는 않았지만, 미러링으로 읽어낸 바울의 반대자들('거짓 형제들')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할례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단순하다. 할례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을 구원의 필수 요소라고 '강요'할 때 문제가 된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의 할례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샌더스는 하나의 통찰력을 보여 준다. 그것이 정말 공로라면 바울이 그토록 거절하는 '율법의 행위'가 되는데, 태어난 지 8일 만에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할례가 어떻게 행위가 되겠는가('선한 행위'와 '율법의 행위'의 차이점은 샌더스가 부록으로 따로 다뤘으며, 동시에 제임스 던의 바울 신학에서 이것을 다룬 부분을 추천한다)?
이제 바울 논쟁에서 가장 '핫'한 부분인 '이신칭의'를 갈라디아서에서 다루어 보자. 샌더스에 의하면, 연대기적으로 이신칭의 개념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처음 등장한다. 비록 학문적인 책이 아니라고 소개했지만, 샌더스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원어의 본래 의미를 다루는 열정을 보인다.
그러나 영어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샌더스가 지적하는 것들 중 하나만 예를 들자면, 우리는 '의'라는 명사와 '의롭게 되다'라는 동사 사이에 이미 '의'라는 개념을 공유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본 구절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우리말 번역 역시 속격 해석에 있어 샌더스의 의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이것은 신약학계에서 꽤나 중요한 문제이다).
논의 과정이 복잡하지만, 어쨌든 필자는 샌더스의 바울 읽기에서 고전적 이신칭의를 발견했다. "바울의 진술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요구된다는 그의 결론에 쉽사리 이를 수 있다(Paul's statment can easily lead to his conclusion that faith in Christ the sole requirement for people to enter the body of Christ·516쪽)".
그리고 바울의 확장된 논의 역시 샌더스는 매우 간략하게 정리한다. 바울의 해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 믿음을 가진(할례가 아니라) 이방인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율법의 용도에 대한 샌더스의 해석은 기존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바울은 '육체'와 '영'을 대립시키는데, 샌더스는 이 '육체'를 앞서 바울이 계속해서 논한 '율법의 행위'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이기심'과 '불친절'이 놓여 있다. 샌더스는 이 문제를 로마서에서도 다루지만,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표지로 작용하는 것을 가리키지 선한 행위로서의 율법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샌더스가 읽어낸 바울의 이신칭의에 일련의 순차적 과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등). 오히려 샌더스는 그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그리스도인 되어감의 과정에 대한 표식임을 바울이 가르친다고 말한다.
4. 빌립보서
빌립보서는 다른 편지들과 달리 유독 애매한 점이 많다. 도대체 어떤 배경에서 기록된 것인지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당사자들끼리만 공유되는 듯한 문제가 빌립보서에서 다루어진다. 게다가 편집적 문제도 눈에 띈다(예를 들면, 2세기까지는 단일한 감독이 교회를 맡았을 텐데 감독과 집사라는 표현이 복수 형태로 나오며, '마지막으로'라는 표현은 두 번이나 나온다).
다만 여러 자료를 역추적해가다 보면, 일단 바울이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구금 중 썼다고 추측할 수 있다.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에 대한 처분은 일반적으로는 지하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으나, 샌더스는 바울이 방문자들을 만나고 편지를 자필로 썼으며, '가이사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만난 것 등을 근거로 하여 그가 특별 대우를 받아 지하 감옥이 아닌 지상에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그래서 빌레몬서도 이렇게 '자유로운 구금 상태'일 때 쓴 것이라고 샌더스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바울 자신의 구금에 대한 발언과 사도행전의 기록 등 전부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샌더스는 말한다. 그만큼 바울서신임이 분명함에도, 서론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이 빌립보서다.
빌립보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기독론이다. 빌립보서에는 '그리스도 찬가(The Christ Hymn, 2장 6-11절)'가 등장한다. 샌더스는 이 '찬가'를 본래 영웅이나 신들에게만 돌리던 개념으로 사용한다. 샌더스는 이 찬가의 저자에게 삼위일체 개념이 없었으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을 완곡하게 피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주'라는 고백은 이러한 공식적 찬가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아쉽게도(샌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행스럽게도), 여기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상관관계가 무엇인지 더 진행하지 않는다. 다만 고대 신화들, 그리스의 페르세포네, 시리아의 아도니스, 이집트 오시리스 신화 등을 통해 신성한 존재들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비교 연구가 가능하리라는 여지를 남겨 둔다. 또 이것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과도 연결되는데, 인간의 고통을 공유하는 '주'라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중요한 개념이었다고 샌더스는 주장한다.
5. 로마서
아마 모두가 샌더스의 로마서 해설에 대한 리뷰를 기다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로마서에는 여러 주제가 있지만, 라이트모티브(leitmotif), 즉 반복되는 중심 주제는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의 동등성"이다(2장 9-10, 28-29절; 3장 9, 22, 29절; 4장 11-12절; 9장 24절; 10장 4절; 10장 12-13절; 11장 32절 등을 참조하라). 즉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비극적 운명에 놓여 있으며,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구원은 차별없이 동일한 근거,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놓여 있다.
샌더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바울은 자신이 발견한 해결책(하나님의 은혜)에서 인간의 문제(불순종 혹은 죄)를 보는 사고를 지녔으나, 로마서에서는 그 역으로 바울의 사상이 전개된다고 주장했다. 이번 책에서 그는 40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러한 자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 앞선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비록 율법으로는 무흠할지라도 부활의 근거는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은 무의미하다는 논증을 펼쳤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그러한 논증을 펼칠 줄 알았는데,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기서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해결책과 그로부터 추적한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보다 더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도식은 정말 모든 로마서의 논지를 지배한다.
일례로 '용서와 회개'를 살펴보자. 그것들은 기독교 뿐 아니라 유대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기존 방식인 회개와 용서를 버리고 자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야 하셨는가? 게다가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만' 이 회개와 용서가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샌더스에 의하면, 그 이유는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이 제공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즉 정답에 맞게 모든 논지가 이끌린다).
'원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왜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샌더스는 바울이 그 이유를 제공하지 못하고 반복할 뿐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리고 샌더스는 진지하게 바울이 실패한 이유 제공을 자신도 할 수 없다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로마서에서의 바울 신학을 오직 그의 큰 전제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큰 전제에 그렇게 지배받지 않는 듯한 흥미로운 주제들도 있다. 6장에는 흔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통용되는 바울의 주장이 나온다. 샌더스는 고대 유대교인들의 경우 희생제사를 드리기 전에 마음가짐을 굳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세례시 일어나는 자유가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신비적 연합 개념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비적인 연합인가, 아니면 정신적 결단인가? 샌더스는 바울이 둘 다를 의도했으며, 사실 기능적으로 죄인으로 하여금 구원(혹은 죄에서의 해방)을 제공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말한다.
7장은 난제 중의 난제이나, 샌더스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개념 자체가 본래 일관성이 없다고 말함으로써(그리고 일부 현대 신학자들이 바울 신학을 조직신학처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공허하다고 비판하면서), 이 복잡한 문제를 쉽게 만든다. 7장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마치 유대교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로마서를 지배하는 중심이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의 동등성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론,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펴 보자.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갑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난다. 그러나 바울은 실제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반전을 경험한다고 쓴 적이 없다고 샌더스는 말한다. 바울이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를 말하는 이유는, 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샌더스는 우리에게, 바울은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교의를 체계적으로 세운 사상가가 아님을, 그리고 로마서 역시 '편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결론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E. P. 샌더스라는 학자의 성실성에 기대 그의 책을 훑어 보았다. 비록 전부는 불가능하지만, 필자는 그의 의견 전체를 최대한 왜곡하지 않고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국내에는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가 명성을 얻고 있지만,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신약학계에 가져온 것은 바로 이 E. P. 샌더스였다.
제임스 던은 자신의 「바울신학」이라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샌더스가 그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소개하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그런 샌더스가 스스로 '바울의 모든 것'을 쓰려고 노력했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또 샌더스는 신약, 초기 기독교 내지 유대교의 전문가가 아니라도 읽을 수 있도록, 전문 용어에 대해서는 볼드체 처리를 했을 뿐 아니라 용어집(10여 쪽)을 부록으로 두는 등, 독자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다. 게다가 현대의 이슈 중 하나인 동성애 문제도 부록으로 간략하게 다룬다.
본서는 신앙을 배제한 채 소위 진보적 신학적 전제가 깔려있는 책이기에, 보수적 사고를 하는 일부 그리스도인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이미 서평에서 어느 정도 발견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논란의 여부가 된다기보다, 대부분 신약학계에서는 통용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샌더스의 최신 저작인 이 책이 국내에 번역돼, 보다 치열한 토론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도서 정보
저자: E. P. 샌더스(Ed Parish Sanders)는 듀크대학교의 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이전에는 맥마스터대학교,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다. 가장 유명한 책으로는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이 있다.가격: 39.00달러(국내 미번역)ISBN-10: 0800629566ISBN-13: 978-0800629564
/진규선 목사(서평가,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