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대지진이 일어난 파키스탄에 봉사를 하기 위해 방문을 했던 저는, 10년 만에 그곳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금번 방문은 2005년에 했던 구호활동을 인정받아, 나라에서 수여하는 감사장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이 국교인 나라로, 국민의 97%가 이슬람을 믿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정세를 보았을 때,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는 이번 방문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피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들은 숙소까지 경찰차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습니다. 호텔을 출입할 때는 모든 투숙객과 방문객들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으며, 숙소에 외국인이라고는 우리 일행들밖에 없었습니다. 차량으로 이동할 때는 창문을 가리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대사관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나 납치를 조심하라'는 문자가 오곤 했습니다.

국민의 97%가 무슬림인 나라. 하지만 가뭄에도 생명의 씨앗은 움트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마을이 있다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안내하는 목사님과 많은 아이들이 우리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콘크리트 바닥과 벽이었습니다. 교회 기물은 사과 상자 같은 강대상과 바닥에 깔린 천 몇 장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열악한 곳에서도 주님을 찬양하는 이 조그만 곳을 돌보고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을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다고 해서, 우리는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파키스탄 방문한 조성래 목사
▲조성래 목사가 한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 ⓒ한국재난구호 제공

 

 

주일에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와서 주일예배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교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교회 밖에서 경찰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보통 예배는 3시간 정도 드린다고 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이라면 숨어서 예배를 드릴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예배 분위기는 매우 뜨거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가 손뼉을 치며 찬양을 부르는데, 그렇게 큰 소리의 박수는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예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백여 명의 교인들이 뜨겁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매우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후에는 또 다른 교회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오전의 교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도 더 많았고 열기가 확 느껴질 정도로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찬양을 하는데, 좋게 이야기해서 율동이지 마치 성령의 새 술에 취한 듯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 역시 교인들과 함께 섞여서 춤추고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순수한 신앙을 보며 굉장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두 교회를 방문해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나니, "우리나라의 5, 60년대 교회도 이랬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 하나 조는 사람 없이 말씀을 듣는 것을 보고, 이 나라에 정말 희망이 있구나 싶으면서 선교를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기 와서 복음을 전하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세계의 선교 역사를 돌아보면, 늘 핍박 속에서 복음의 꽃은 더욱 활짝 피었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교회가 세워지기만 하면 부흥된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슬람권의 나라에서 교회가 쇠퇴하는 것이 정상인데, 잘된다고 하니 놀라웠습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시대의 사명이 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선교하러 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환경이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 방문한 조성래 목사
▲빈민촌의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를 보고 조성래 목사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한국재난구호 제공

 

 

다음 날부터는 양일간 목회자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첫날에는 다소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니 태도가 달라지고 다음 날에는 더 많이 참석했습니다. 세미나가 끝날 무렵, 저는 참석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를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목숨입니다. 여러분은 목숨을 내놓을 수 있으십니까?" 예상 외로 많은 이들이 큰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저는 두 번째 질문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면 두 번째로 나의 모든 소유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분은 손을 들어 보세요." 여러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저는 손을 든 사람들 중 하나를 앞쪽으로 불러 세웠습니다. 재산이 얼마 있냐고 했더니, 집 한 채와 자동차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자동차 열쇠와 집 열쇠 한 꾸러미를 선뜻 제 손에 쥐어 줬습니다. 체면상, 혹은 어쩔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참 동안 세미나를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감동이 돼서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의 3D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의 임금이 월 15~20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자동차는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로, 쉽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많은 성경 지식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한국교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미나가 끝나자, 주최측이 5월에 목회자 세미나를 또 하자고 합니다. 3만 명 모을 수 있는 체육관을 빌려서 대형 집회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이 대형 집회를 열자고 하는 것이 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복음을 듣고 전하는 일에 개의치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강한 열정과 예수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보며,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으로 인해 온 세계가 혼란스럽고 시끄럽지만, 분명한 것은 박해가 심할수록 기독교는 확산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타락은 따뜻하고 배부를 때 찾아왔습니다. 한국 역시 생각과 지식, 물질의 부요함으로 인해,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살기 어렵지 않은 인본주의로 인해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파키스탄 방문한 조성래 목사
▲파키스탄 빈민촌의 모습. ⓒ한국재난구호 제공

 

 

세미나 후에는 빈민촌을 방문했습니다. 20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많은 가난한 마을들을 봐 왔던 저지만, 이번에 방문한 빈민촌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도시 외곽에 있는 조그만 마을. 그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처참했습니다. 무엇보다 영양실조로 병든 아이들의 모습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집은,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다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짐승이 사는 곳도 이렇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준비해 간 생필품을 나눠 주고, 그들의 마을을 새로 건축해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올해 5월쯤 이곳에 다시 방문해 마을 전체의 집을 새로 지어 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을에는 한 손에 손가락이 6개 난 아이가 두 명 있었습니다. 이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수술을 해 주려고 여기저기 병원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외국인이라 보험도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무료로 해 주겠다는 곳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현지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이들에게 수술비 전액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천들의 60%만 이 말씀을 실천해도 세계를 뒤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전에 스리랑카 선교사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스리랑카는 한국보다 복음을 일찍 접한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불교 국가입니다. 선교사님이 하는 말이, 롤모델이 없다고 합니다. 롤모델을 보고 '아, 저렇게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구나' 하며 배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이 모범이 되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면, 전도는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내 것을 희생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 실천과 착한 행실이 식은 신앙은 종교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저개발국에 방문할 때마다 피부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뜨겁게 사모하는, 그들의 순수한 신앙입니다. "한국도 이전의 뜨거웠던 신앙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