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님이 보이신 생명 사역의 섭리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12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 이것을 왜 권능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에 권능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이러한 권능을 성령으로 무장시키셔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내셨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영혼구원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미치광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권능을 통해서 그 권능을 체험하고 지켜 본 사람들은 이 권능을 주신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사역의 목적입니다. 이런 이적과 기사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이제 예수님께서 전도의 방법으로 생명 사역의 섭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이적을 통한 생명 사역의 섭리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에게 심방을 갔습니다. 그때는 지방에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어느 집에 그 지역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거기서 애니아(찬양이라는 뜻)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애니아가 중풍병으로 사지를 못 쓰게 되어 자리에 누워 앓은 지 팔년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벌써 8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사람구실하기 힘들 것이라고 모두 생각했을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에 이끌려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따라 애니아를 붙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성경의 증거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목자는 양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 중재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양떼 그 사이에 목자가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 양떼를 위해서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목자와 양떼의 관계를 확인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애니아를 붙잡고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애니아를 살려서 쓰시겠다는 응답이 왔습니다. 베드로가 기도 끝나기 바쁘게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34절)하니, 애니아가 벌떡 일어나서 누웠던 자리를 정돈하는 것입니다. 그 후 35절에 보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그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는 것입니다. 소문만 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 사역의 섭리입니다. 베드로와 애니아를 목양지간으로 묶어주셔서, 목자를 통하여 병 고침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 체험하는 은혜를 뛰어넘어, 많은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한 표적이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3. 다비다를 통한 생명 사역의 섭리
36절부터 보면 욥바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곳은 지금 텔아비브라고 불리며,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가 있는 곳입니다. 바로 그 욥바에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가 있었는데, 유대인의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라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선행과 구제를 했습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 구원을 얻어, 영혼이 하늘나라 갈 신령한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와 자기가 가진 재산을 아낌없이 복음의 제물로 투자했습니다. 옷감을 많이 사서 과부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재봉하여 만든 옷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전도하였습니다. 그 영혼들이 생명 얻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구제와 선행이 주변에 두루 퍼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다락에 뉘어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을 것이고,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병들어 죽은 모습을 보면서 시험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룻다로부터 애니아의 중풍병을 베드로가 고쳤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렇습니다. 룻다와 욥바의 거리가 약 14km정도, 삼십 오리쯤입니다. 그 소문을 들은 제자들은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욥바에 도착했습니다. 저희가 베드로를 데리고 다락에 올라갔습니다. 다비다와 함께했던 과부들이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가 저희와 함께 살아 있을 때에 만든 속옷과 겉옷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런 선행과 구제를 통해서 다비다는 전도 사역에 엄청난 성과를 올려드린 사람인데,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되살려가지고, 이런 방법으로 계속 생명 사역을 하게 하시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구원을 얻겠는가하며 아쉬움을 호소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나가게 하고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기도에 응답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비다를 되살려 생명 사역을 위해 계속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고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시체를 향하여 말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했더니, 다비다가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일으킨 다음, 아래 층에 있던 성도들과 과부들을 다 올라오라하여 살아난 다비다를 보여주었습니다. 분명 자기네들이 시체를 씻어서 이층 방에 눕혔는데, 베드로가 기도하여 되살아난 다비다를 부둥켜안으면서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이 소문이 욥바 전 지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온 욥바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많이 주를 믿었습니다. 다비다가 죽었다가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되살아나게 된 이적이 기폭제가 되어 욥바의 많은 영혼들이 구원 얻게 하시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 사역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다비다를 통해서 생명 사역이 계속되어지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다비다를 되살리심으로 그가 주께서 살리시는 날 동안 계속 옷을 지어 전도하는 일로 구령 성과, 즉 생명 사역의 더 많은 성과로 쓰임 받게 하셨다는 것도 함께 깨달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다비다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그 여인은 자기 생애와 가진 모든 것을 생명 사역에 바쳤습니다.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인생이니까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여인처럼 생명 사역에 헌신, 봉사, 충성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를 되살려 쓰시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목숨이 먼저입니까? 생명 사역이 먼저입니까? 그 사람에게 생명 사역의 성과가 분명히 보여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생명을 보장하시면서 쓰실 줄로 믿습니다.